빌 에반스가 남긴 유산은 상당하다. 그는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이상적 모델을 제시했으며 나아가 재즈 피아노로도 리듬으로부터 자유로운 섬세하고 은밀한 개인적 감수성을 표현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동료나 후배 피아노 연주자들은 빌 에반스의 피아니즘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특히 버드 파웰이나 아트 테이텀을 칭송하는 연주자들 조차도 개인적 선호도에 있어서는 빌 에반스를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빌 에반스의 유산은 어느 정도일까? 일본의 빅터 레코드사에서 기획한 이번 <빌 에반스의 초상>이 그 작은 증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앨범은 허비 행콕을 시작으로 밥 제임스, 브래드 멜다우, 데이브 그루신, 엘리안느 엘리아스 등 적어도 이 시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다섯 명의 피아노 연주자들, 그것도 하나의 스타일리스트로서 다른 피아노 연주자들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색을 지닌 연주자들을 불러 빌 에반스의 연주를 재현하는데 애쓰지 말고 자신에게 영향을 기친 대로 빌 에반스의 애주(愛奏)곡들을 연주하도록 했다. 그래서 밥 제임스의 경우 빌 에반스식 연주라 하기엔 뜻밖이라 할 수 있는 일렉트릭 퓨전과 혼악기가 가세한 편성으로 연주하는 등 다양한 측면의 빌 에반스의 모습이 정리되었다. 그 중 그래도 가장 빌 에반스다운 연주는 아무래도 브래드 멜다우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빌 에반스의 흔적 이전에 다섯 연주자들의 현재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빌 에반스가 이 다섯 연주자들의 현재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런 이유로 얼핏 보면 이 앨범은 빌 에반스와 상관없는 현대의 대표적 재즈 피아노 연주자 5명의 연주 모음 정도로 비추어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솔로와 인터 플레이 등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빌 에반스의 흔적을 발견하는 순간 그의 영향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는지 알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