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재즈는 단순히 라이브의 분위기를 유지하며 연주자의 테크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에 국한하지 않는다. 이미 밥이니 쿨이니 히는 스타일은 그 자체로서는 힘을 잃어 버린지 오래다. 이제 재즈는 어떤 음악적인 것이 아니라 사고, 이미지를 중심으로 그 스타일이 정리되고 있다. 이것은 일견 재즈가 본연의 자세를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현대 문화의 흐름에 비추어 본다면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 단지 순간적 흥겨움에서 지속적인 이성으로 재즈를 사고하는 틀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 음반이 제작된 CC Production의 주인이면서 화가이기도 한 베르트랑 르노뎅이 여정이라는 화두를 들고 나타난 것은 그러므로 새로운 일은 아니다. 이미 여정이라는 화두는 대표적으로 팻 메시니를 통해서 친숙해진 상태다. 그런데 베르트랑 르노뎅이 만들어 내는 여정은 메스니처럼 연주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작곡의 단계에서 베르트랑 르노뎅의 여정의 이미지화는 시작된다. 그러니까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그 장소의 느낌을 그대로 음악화를 한다. 순간적 만남과 그 일시적인 느낌의 지속화. 이것은 일견 미술에서의 모네나 세잔에 비견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각 곡 자체에는 여정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공간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드러날 뿐이다.(앨범에 담겨있는 각 곡에 대한 작곡노트가 이를 강조한다.) 그런데 이런 곡들이 모여서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 내면서 부분의 합을 넘어서는 여정이라는 이미지가 생성된다.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12개 도시에 대한 베르트랑 르노뎅의 개인적 느낌이 하나의 여행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각 곡들이 유럽과 중동, 그리고 미국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해서 그 지역의 음악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전적으로 각 곡들은 기본적으로 베르트랑 르노뎅이 지금까지 제시했던 MOP의 개념, 그러니까 즉흥 연주에 열려 있고(Music Open) 멜로디와 음악적 색깔에 있어서 대중적인 (Popular)음악을 한다는 사고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곡들이 멜로디 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쉽게 다가온다. 이것은 리듬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의 작곡으로서는 놀랍다. 매우 섬세하면서 감각적인 멜로디들이 각 곡마다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 각 연주자들이 멜로디로부터 발전시켜 내는 즉흥 연주 역시 자유로운 동시에 무척이나 멜로딕한 면을 유지한다.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 낸 베르트랑 르노뎅은 드럼 연주에서도 단순히 리듬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넘어 부드러움과 힘을 조절해 나가며 다양한 음색으로 곡들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베르트랑 르노뎅과 오랜 시간 함께 활동해온 에르베 셀랭과 이브 루소의 연주에서는 언제나처럼 깨끗함과 간결함이 들린다. 한편 이 앨범에는 기존의 MOP 트리오 외에 두 명의 연주자가 초빙되었다. 북유럽의 재즈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요나스 크누손과 현재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동유럽 출신의 게오르기 코르나조프가 참여해서 공간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게오르기 코르나조프가 들려주는 트롬본의 우수 가득한 연주는 앞으로 주목할 연주자로 인식하게 한다.
각 도시에 대한 느낌을 담고 있기에 각 곡들의 스타일도 일관된 면 속에 조금씩 다른 면을 보여준다. 서정성과 함께 ECM류의 공간적 느낌이 녹음과 함께 아주 강하게 드러난 곡이 있는가 하면 경쾌하고 불루지한 곡도 있다. 기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의 다양함을 보는 듯하다. 그 중에서 중동의 도시들에 대한 곡들이 개인적으로 와 닿는다.
과거에도 재즈는 단순히 혀를 내두를 만한 기교있는 연주자를 우선시하지 않았다. 스윙감, 블루스 필링이 강한 연주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것이 이제는 연주에 자신의 색과 새로운 이미지를 담고 있는 연주자에게 손을 흔든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베르트랑 르노뎅의 음악과 연주는 음악적으로나 대중적으로 대접을 받을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