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65세가 되어버린 이탈리아의 대표적 트럼펫 연주자 엔리코 라바는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의 한 해 프로그램 전부를 헌정 받고 2002년 재즈파 상을 수상할 정도로 재즈의 대가로 인정을 받고 있지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과 트럼펫 연주는 아직도 신선하고 젊은 느낌이 묻어난다. 이러한 그의 최근 활동을 보면 유럽의 아방가르드 재즈의 선봉에 섰었던 젊은 시절의 열정을 노장의 여유로 완화시키고 시적이고 서정적인 그만의 사운드를 탐구하는데 주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시정의 탐구는 <Rava Plays Rava>(Philology 2000)같은 앨범도 있기는 했지만 의외로 자신의 리더 앨범보다는 세션 연주에서 더 잘 드러나곤 한다. 다양한 편성과 음악 속에서도 자신만의 연주를 유지하는 능력을 키우려 했던 것일까?
그러던 차에 아주 오랜만에 ECM으로 돌아와 발표한 이번 앨범 <Easy Living>은 엔리코 라바의 새로운 자기 점검, 자기 확인이자 그동안 그가 탐구해 온 내면적 시정의 방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최근 주로 스탠더드 곡이나 다른 연주자의 곡들을 연주해왔었던 그가 앨범의 타이틀 곡-이미 폴 데스몬드가 자신의 명반 타이틀로 사용했었던-을 제외하고 자신의 곡으로 채우고 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이 곡들은 모두 곡의 빠르기와 상관없이 엔리코 라바만의 공간적이고 사색적인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매우 다양한 색채를 띠고 있다.
여기에 사색적으로 변화한 엔리코 라바의 모습을 넘어 그간 자신의 활동에 대해 종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엔리코 라바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것은 특히 따듯한 톤 중심의 서정적 흐름 속에서 불현듯 예리한 톤으로 비약하는 연주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그래서 앨범에 담긴 엔리코 라바의 시정은 멜랑콜리나, 낭만의 정서에 국한되지 않는, 그 이상의 복합적이고 다양한 뉘앙스를 지닌 것으로 인식된다. 한편으로 이 앨범은 최근에 보기 드문 최고의 그룹 연주를 들려준다. 전체 사운드에 무게를 부가하는 지안루카 페트렐라의 트롬본부터 테크닉이나 정서적 표현에서 절정의 연주를 들려주는 스테파노 볼라니 등 엔리코 라바의 정식 퀸텟 멤버들이 엔리코 라바와 함께 만들어 내는 정교한 호흡은 그 자체로도 매우 짜릿한 것이다. 아무튼 이 앨범은 최근 엔리코 라바의 앨범들 중 가장 공을 들인 앨범이고 또 그 결과 또한 인상적임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