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쳇 베이커는 24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막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앨범 녹음을 시작한 상태였다. 이전까지 그는 바리톤 색소폰 연주자 제리 멀리건 퀄텟의 멤버로 활동을 했었다. 그 와중에 약물 문제로 제리 멀리건이 감옥에 가게 되면서-사실 제리 멀리건이 쳇 베이커의 죄까지 모두 뒤집어 쓴 것이었다- 퀄텟은 해체되었고 이를 계기로 제리 멀리건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사실 쳇 베이커는 제리 멀리건 퀄텟 시절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그에게 큰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이런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스트링 오케스트라와 앨범을 녹음한다는 것은 당시 쳇 베이커로서는 때이른 시도로 비춰졌다. 제작자들은 보다 투자 가치가 있는 연주자들 즉, 찰리 파커처럼 보다 경력이 있으며 그만큼 꾸준한 지지층을 확보한 연주자들에게만 이런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막 솔로 활동을 시작한 쳇 베이커는 당시 퍼시픽 레이블의 제작자였던 딕 복에게 스트링 오케스트라와 연주하고 싶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음악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배경 음악에 가까운 앨범을 녹음하여 보다 큰 돈을 벌고픈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의 고집으로 인해 딕 복은 컬럼비아 레코드와 합작을 통해 이 앨범을 제작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래서 쇼티 로저스, 자니 멘델, 마티 페이치, 잭 몬트로즈가 편곡을 담당하고 러스 프리맨, 주트 심스 등이 참여하여 앨범을 녹음하게 되었다.
그렇게 녹음한 앨범은 부드럽고 편안한 음악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앨범에 참여한 자니 멘델 같은 경우 이 앨범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3년의 상황에서 본다면 이 앨범에 담긴 쳇 베이커의 트럼펫은 상당히 신선한 것이었다. 이전까지 재즈 트럼펫 하면 의례 연상되던 루이 암스트롱, 디지 길레스피 같은 비브라토가 강한 트럼펫과는 다른 소리를 들려주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스트링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흐르는 그의 트럼펫은 그가 얼마나 멜로디적 감각이 뛰어난가를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분명 쳇 베이커의 음반 이력 전체를 놓고 본다면 이 앨범은 그렇게 큰 위치를 점유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1953년, 24세의 젊은이가 아무 생각 없이, 아니 상업적 이유만으로 스트링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것 치고는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청량한 사운드를 들려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