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 길레스피와 스탄 겟츠를 통해서 아프로 쿠반 재즈와 보사노바 재즈의 형태로 재즈에 편입된 이후 라틴 재즈는 지금까지 약 50년 동안 재즈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일정 영역을 차지해왔다. 이런 라틴 재즈의 위치를 현재의 입장에서 정리하려는 의도로 한편의 다큐멘터리 형식의 장편영화가 페르난도 트루에바 , 프랑스의 방송국 ARTE와 CINETEVE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 그 영화의 동명 사운드 트랙이 이 앨범이다.
뉴욕의 54번가의 소니 스튜디오에서 12일간 녹음된 이 앨범에 참여하고 있는 연주자들의 면모는 의도만큼이나 화려하다. 추초 발데스를 비롯해 티토 푸엔테, 치코 오파릴, 파키토드리베라, 차노 도밍게스, 미셀 카밀로 등 과거부터 현재까지 라틴 재즈를 대표할만한 대부분의 라틴 연주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마크 존슨 등의 라틴권 밖의 연주자들이 사이드맨으로 앨범을 채우고 있다.
총 두 장으로 된 앨범 전체에는 라틴 재즈가 갖는 다양한 면을 모두 드러내고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Compa Galletano’ 같은 토속적인 면을 강조하는 세션이 있는가 하면 ‘Afro-Cuban Jazz Suite’ 같은 멜로디와 다양한 리듬이 동등한 힘을 지니며 축제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현대화된 세션도 있다. 여기에 엘리아니 엘리아스가 펼치는 기존의 재즈적 느낌이 강한 트리오 세션이나 가토 바비에리의 약간은 주술적인 색소폰이 등장하는 긴장감 있는 세션까지 라틴 리듬만큼 형형 각색의 음악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베보 발데스와 추초 발데스 부자간의 정겨운 피아노 듀오곡 ‘La Comparsa’ 같은 연주가 새롭게 다가온다. 두 대의 피아노가 여전히 라틴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래도 리듬 악기의 배제를 통해 분위기보다는 라틴 재즈의 멜로디에 내재된 밝은 정서를 부각시키려 하고 있다. 이것은 추초 발데스 혼자서 펼치는 ‘Caridad Amaro’에서도 드러난다.
밥 시대 이후 지금까지 재즈는 주로 감상용 음악의 생산에 주력해왔다. 그러나 재즈의 역사가 춤을 추기 위한 도구음악으로 시작되었음을 생각할 때 그런 즐김의 정신이 라틴 재즈를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면에서 <CALLE 54>는 라틴 재즈의 유희적인 면을 잘 된 연주로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