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오 편성의 지난 앨범 <Architecture>(Sketch 1999)를 통해서 새로운 이태리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인상을 강하게 드러냈던 죠바니 미라바시가 이번에는 혼자서 피아노 앞에 앉아서 녹음을 했다. 젊은 신예 피아노 연주자가 혼자서 연주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 부담을 지니고 있는 일일텐데 결본부터 말하면 매우 완성도 높은 앨범이 완성되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바라보기에 따라 색이 변하는 두 개의 감상포인트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앨범은 유독 그 정도가 심할 듯싶다. 그것은 앨범이 음악적인 면과 음악 외적인 면에 약간의 엇갈림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기인한다.
앨범의 제목 ‘Avanti!’는 개인적으로 이태리어에 무지하지만 유추해볼 때 전진!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리고 자켓의 검정색과 붉은색-빨간색이라기 보다는-의 강한 대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앨범에 담긴 곡들은 세계 각지의 혁명가, 투쟁가, 반전가 등의 형태로 존재했던 곡들이다. 즉, 음악 이전에 사회 정치적 담론이 더 강조되었던 음악들이 앨범에 담겨있다. 그런데 죠바니 미라바시가 이 곡들을 풀어가는 방식을 보면 논쟁의 여지가 생긴다. 그도 그럴 것이 죠바니 미라바시가 채택한 방법은 정치적인 면을 뒤로 숨기고 음악 자체에 내재된 면을 더 드러내려는 것으로 비추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죠바니 미라바시가 정말 각 곡들을 정치적인 면을 무시하고 연주했다고도 볼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수십페이지에 걸쳐서 각 곡과 관련된 혁명, 투쟁 관련 이야기와 사진들을 제시하고 있는 해설 노트때문이다. (그 제시가 매우 훌륭함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과연 이것이 잘한 선택이었는가? 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음악을 넘어서 음악은 무엇에 종사해야 하는가?라는 식의 음악 사회학적인 화두가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죠바니 미라바시의 의도는 단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이 둘을 융합하는 즉, 정치적 담론이 부가된 음악 이전에 시간에 의해 퇴색되어가는 곡들을 다시 현대에 맟게 복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 현재까지 많은 부분들이 부조리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와는 다른 조건으로 진행된다. ‘El Paso Del Elbro(스페인 시민혁명)’, ‘Hasta Siempre(쿠바 혁명)’, 만델라를 반영하는 ‘A Si M’bonanga’ (그리고 존 레논의 ‘Imagine’) 등 죠바니 미라바시가 연주하는 곡들은 특정 시기의 정치적 담론이 유효를 상실하면서 그 결과와 상관없이 향수라는 이름으로 무화되고 있는 곡들이다.
그래서 미라바시는 각 곡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다른 방법으로 되살린다. 즉, 왼손(Left!)을 단순화 시키는 것! 왼손 하모니를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른손에게 더 많은 힘을 부여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로 인해 구조 속에 갇혀 있던 멜로디가 상승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좌익의 우익으로의 전향같은 정치성의 왜곡이나 순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안된다. 왜냐하면 비록 쿠바 혁명, 칠레 혁명같은 특정 시기의 특정 사건과의 관련이 상징적인 차원으로 축소된다고 하지만 이로 인해 시간을 뛰어넘는 인간적인 감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예가 앨범의 타이틀 곡-Avanti!라는 곡은 없다-이라 할 수 있는 유일한 미라바시 본인의 곡 ‘My Revolution’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겠는데 초반부의 긴장이 가득하고 무거운 터치가 지배하는 연주 뒤에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연상시키는 애상적인 멜로디가 조금씩 위로 상승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 각 곡들이 지닌 분위기는 매우 이탈리아적이고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그리고 그런 서정성은 소소한 인간 개인사보다는 다른 차원의 거대한 이야기를 생각하게 한다. 이것을 표현하는 죠바니 미라바시의 방법은 일견 키스 자렛이 솔로 연주에서 보여주었던 멜로디와 밀접한 관련하에서 펼쳐지는 극적이고 거대한 부분을 생각하게 한다.
음악은 선전선동의 도구 이전에 기본적으로 인간적 감정의 발현이다. 그런 면에서 이 앨범은 음악 자체로서 진가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곡들의 내면적 진실을 드러내어 특정시간에서 음악을 분리시켜 통시간성을 부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어쩌면 미라바시가 이 곡들을 다른 편성이 아닌 솔로로 연주하는 것도 그런 이유의 하나가 아닐까. 집단적 기억이 감상자 개인에게 내면적 이야기로 다가가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