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앨범은 프리 재즈 앨범이다. 그러나 믿기 어려운 프리 재즈 앨범이다. 매우 아름다운 연주로 꾸며진 순수한 앨범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침묵을 통해서 드러난다. 지난 해 우연히 한 다큐멘터리에서 마릴린 크리스펠의 짤막한 인터뷰가 나왔는데 그 자리에서 크리스펠은 자신이 침묵에 애착을 지니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적은 음들의 배열이 지루하게 생각되었는데 후에는 그 음들이 침묵과 함께 하나의 특정 음이 아닌 다중적 의미를 지닌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됨을 느끼면서 침묵에 애착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 대략적인 그 내용이었다.
사실 이런 침묵의 적극적인 활용은 같은 편성으로 녹음했던 <Nothing Ever Was Anyway>(ECM 1997)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앨범이 미리 기보된 곡을 크리스펠 식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담아냈었다면 이번 앨범은 특정 순간 세 연주자의 교감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즉, 프리 재즈라 할 수 있는데 의외로 녹음된 곡들은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물론 세 연주자가 함께 활동을 했던 적이 많다는, 그래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또 앨범에 담긴 몇 곡은 이전에 연주되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각 곡들이 세 연주자의 자유로운 생각을 담고 있으면서도 일련의 유기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은 침묵의 힘이 크다. 그 침묵의 힘은 단지 각 음들간의 공백을 의미하는 차원이 아니라 세 연주자의 아우라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공간을 확장하고 자신의 순간적 느낌을 자동기술적으로 표현한다기 보다는 충분한 호흡으로 그 느낌을 이성화하고 또 다른 연주자의 연주에 반응할 수 있게 하는 느림으로 이어진다. 이런 느림에 대한 부분에서는 제작자 맨프레드 아이허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그가 크리스펠에게 느린 프리 재즈 앨범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연주자는 ‘M.E’라는 아이허에 대한 헌정곡을 연주하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Amaryllis’, ‘Voices’, ‘M.E’, ‘Avatar’를 들어보기를 바란다. 이 곡들은 녹음 당시 완전한 즉흥 연주에 의해 만들어진 곡이다. 즉,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싱싱하게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곡들은 마치 미리 기보된 부분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안정적인 내적 구조를 가진다. 침묵과 느림의 효과를 그대로 반영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크리스펠의 연주는 그래서 그녀도 영향을 인정하고 있는 존 콜트레인의 후기 스타일이나 세실 테일러의 영향보다는 오히려 빌 에반스, 키스 자렛으로 이어지는 멜로딕한 스타일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한편 폴 모시앙의 연주는 이미 다른 리뷰를 통해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리듬을 겉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심벌과 그 잔향을 위주로 다양한 색으로 펼쳐지는 순간적 소리의 공간화를 더 많이 강조한다. 오히려 리듬은 베이스를 연주하는 게리 피콕에 의해서 더 많이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를 지배하는 리듬이 있다기 보다는 세 연주자가 내부적인 리듬을 독자적으로 지니며 자신들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인상이 더 강하다.그래서 이런 악기에 고정된 역할을 벗어나는 연주를 통해 각 곡들은 서정성을 획득하면서도 자유로움을 잃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감상의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효과는 다른 공간으로 감상자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내면으로 파고드는 세 연주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게 한다. 그렇다고 연주자의 테크닉에 신경을 쓰게 하지는 않는다. 완전히 정제되어 다가오는 자유연주 그 자체의 정수를 가슴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래서 정적인 면이 강한 꽃 이름(Amaryllis)을 앨범의 타이틀로 정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환기시키는 2차적인 느낌-어떤 개인적 감정의 상태로 빠지는-에 의해서 음악이 마음에 들어오는 경우를 벗어나 그냥 음악 그 자체가 지닌 미가 그대로 전달되어 미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 즉 음악과 감상자 개인의 경험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생성되는 것이 아닌 연주자의 음악적 Aura가 감상자에게 전달되면서 미학적 쾌감이 발생하는 것이다. 음악 그 자체의 순수! 바로 이 앨범 Amaryllis가 그런 경우다. 그래서 아직 두 달이나 남았음에도 감히 이 앨범을 올 상반기 최고의 앨범이라고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