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ropean Jazz Trio의 이력은 매우 특이하다. 왜냐하면 17년이 넘는 기간동안 멤버의 교체를 거듭해 현재는 초기 멤버들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연주자 개인도 연주활동을 오래하게 되면 시기별로 음악적 변화를 보이는데 그럼에도 이 트리오만의 색채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렇다고 바꿀 수 없는 스타일이 트리오에게 의무처럼 부가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트리오의 색을 결정하는 피아노 주자의 음악적 색깔이 비슷하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1984년 결성당시 이 트리오의 피아노 주자는 카렐 보엘리(Karel Boehlee)였고 이 후 1995년부터 마크 반 룬(Marc Van Roon)이 담당하고 있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의 연주를 비교해보면 그다지 많은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클래식적인 기반을 드러내는 깔끔한 연주가 이 두 연주자의 공통점이고 또 이 부분이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의 특성으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번 앨범 Adagio는 앨범 전체를 클래식으로 채우고 있다. 일견 이것은 이들의 활동을 통해서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많은 앨범들이 한두 곡 씩은 클래식 연주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멜로디에 기반을 두고 수평적으로 부드럽게 진행하는 피아노의 연주라인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오히려 당위적인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이 트리오가 클래식을 연주해 나가는 양상은 역시 클래식 곡들을 재즈로 연주했던 유진 시세로의 방법과 유사하다. 즉, 클래식의 고전성보다는 하나의 멜로디로 간주하고 일반 재즈의 스탠더드 곡을 연주하는 식의 진행을 보인다는 것이다. 특별한 실험성같은 것은 없다. 하나의 친근한 멜로디가 있고 그것을 기반으로 부드러운 진행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클래식을 재즈화했다는 것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일반 스탠더드 곡집처럼 바라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앨범에 담긴 연주들은 예의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의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 나간다. 베이스와 드럼이 기본적인 역할 이상을 벗어나지 않고 전체를 멜로딕한 피아노가 이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분위기를 위한 앨범으로는 좋을 것이다. 그냥 플레이어에 걸어놓고 다른 일을 하며 듣는 그런 앨범 말이다.
그러나 분명 귀를 쫑긋 세우고 감상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렇게 감상한다면 이 앨범은 쉽사리 싫증이 날 수 있다. 그것은 사탕같은 부드러움과 편안함을 추구하면서 너무나 모든 것을 단순하게만 처리한 결과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클래식 곡은 이 앨범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저 하나의 동기에 지나지 않는다. 음악적인 부분에서 곡의 해석을 시도하려 하지 않고 감성적 분위기를 먼저 상정하고 그를 따르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필자로서는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훌륭한 연주력을 가진 트리오가 편안함을 추구하면서도 보다 진지한 그런 음악에 대한 고민을 더 했었다면 어땠을까?
한편 이런 부분은 물론 연주자들 본인에게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제작자의 책임을 무시할 수 없을 것같다. 이 앨범의 녹음이 비록 유럽에서 행해졌다지만 모든 기획과 제작은 일본에서 시도된 것이다. 그만큼 일본인의 취향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라고 하지만 이들이 연주하는 라인들은 실제 유럽의 피아노 트리오가 보여주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감상의 편안함과는 다른 차원의 통상적인 피아노 트리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음악적 긴장이 부족하다는 것에 있다. (실제 유럽내에서 이들의 지명도는 미약한 편이다. 일본에서 인기가 더 많다.) 신기하게도 이런 경향은 유명한 Kenny Drew Trio가 일본에서 앨범을 발표했을 때도 그러했다. 이 모두 재즈를 처음 듣는 사람을 위한다는 재즈 앨범제작의 방향을 한없이 가벼운 스타일로 설정하는 일본인 제작자의 영향 때문이다. 이번 앨범 역시 일본인의 취향과 트리오의 음악적이 아닌 감상적 부분이 상업적으로 만났다는 의혹을 피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그래서 이 앨범이 그 대상으로 설정한 재즈를 처음 듣는 사람들이라는 특정 수용자 층을 넘는 인지도를 확보하기엔 한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