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야 사실 언제 들어도 좋은 것이지만 유달리 특정 계절, 특정 시기에 들으면 더 맛이 좋게 느껴지는 앨범들이 있다. 그렇다면 여름에 듣기 좋은 재즈 앨범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여름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음악이어야 하겠지? 그렇다면 여름 이미지란 무엇일까? 아무래도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파도가 있는 해변,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산 속, 그리고 이런 자연 속으로 떠나는 여행길이 제일 먼저 떠 오를 것이고 또 이것저것도 아닌 경우에는 한가로이 집에서 오수를 즐기며 기분 좋은 따분함을 즐기는 그런 시간이 여름의 이미지에 적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런 이미지에 부합되는 재즈 앨범은 무엇이 있을까? 필자의 철저하게 주관적인 상상력에 의해 필자의 라이브러리에 보관된 몇 장의 앨범을 선정 소개하여 본다. 기본적으로 소개하는 앨범들은 쉽고 듣기 편한 것은 물론이고 이국적인 것, 그래서 떠나는 길에 설렘을 더하고 상상만으로도 여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앨범들이다.
제일 먼저 찾아낸 앨범은 브라질 출신의 오르간 연주자 Walter Wanderly의 <Rain Forest>(Verve 1966)다. 이제 재즈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또 그 음악적 이미지 또한 과거 지미 스미스로 대표되는 오르간 연주자들이 표현해 낸 후끈거리는 열기를 아직도 지니고 있지만 왈터 원덜리의 오르간 연주는 전혀 반대의 이미지를 지향한다. 브라질의 보사 노바 명곡을 오르간으로 담백하게 연주하고 있는 이 앨범에서 그는 앨범 표지의 이미지처럼 나무들이 울창하고 새가 우는 울창한 숲 속의 아침을 연상시키는 시원하고 이국적인 브라질리안 사운드를 들려준다. 게다가 때로는 울렁거리는 오르간 연주에 담긴 습기가 철 이르게 휴가를 떠난 해변에서 비를 만났을 때의 낭패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앨범은 버브사의 By Request 시리즈 중 하나로 새로이 발매되었는데 그 시리즈를 살펴보면 유사한 여름용 앨범이 다수 발견된다. 그 중 Paul Desmond의 <From The Hot Afternoon>(1969)가 눈에 띄는데 원래 폴 데스몬드의 색소폰 컬러는 시대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매끄럽고 시원함은 물론 아련하고 나른한 느낌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이 앨범에서도 그 분위기는 마찬가지인데 아련한 바람결 같은 스트링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긴장을 이완시키는 리듬에 맞추어 그는 나른하고 한가한 그래서 기분 좋은 오후의 한때를 노래한다. Edu Lobo의 <Sergio Mendes Presents Lobo>(1970)도 여름에 듣기 좋은 정서를 제공한다. 한때 포스트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이라고 불렸던 이 기타 연주는 브라질리언 재즈와 팝 음악 사이에서 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특히 이 앨범은 세르지오 멘데스가 편곡에 참여하여 브라질적인 나른함을 보다 더 대중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한편 Stan Getz의 <What The World Needs Now – Stan Getz Plays Bacharach & David>(1968)도 들어볼 만 하다. 원래 스탄 겟츠 하면 보사 노바 재즈를 미국과 세계에 보급한 인물이기에 뜨거운 날의 나른한 음악을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존재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대표적 앨범이라 할 수 있는 <Getz & Gilberto>(Verve 1962)가 너무 많이 감상해서 식상 하다면 이 앨범을 들어보기 바란다. 1960년대 미국 대중 음악에 큰 발자취를 남겼던 버트 바카락의 곡들을 아주 짧은 형식으로 연주하고 있는 앨범인데 상쾌한 빅 밴드 오케스트라의 브라스 섹션, 바다의 낭만을 전하는 스트링 섹션, 그리고 한가로운 리듬의 이어짐, 그 위를 감미로운 스탄 겟츠의 색소폰이 흐른다. 정말 파도소리를 배경에 깔고 듣고 싶은 그런 사운드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의 개인 앨범 이력에 있어 이 앨범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소위 너무 대중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인데 여름 이미지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부드러운 대중적 이미지가 가장 여름을 상상하게 하는 매력이다.
이번에는 다소 경박한 표지를 지닌 시리즈 앨범을 소개하겠다. 지금의 레이싱 걸들이 저런 이미지를 이어받았을까? 때로는 007 영화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본드 걸을 연상시키는 앨범 표지를 하고 있는 이 앨범들은 Rare Groove라는 이탈리아 레이블에서 기획한 것으로 <The Bossa Nova Exciting Jazz Samba Rhythms>와 <From Latin To Jazz Dance>라는 이름 하에 각 6장씩 시리즈 형태로 발매되었다. 앨범에 담긴 곡들은 50년대부터 7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발매되었던 다양한 라틴 음악의 희귀 트랙들이다. 그래서 음악적으로도 30년에 이르는 라틴 재즈, 라틴 음악의 규모를 파악하게 해준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보다 끄는 것은 각 트랙들이 전달하는 복고적이며 이국적인 정취들이다. 컬러지만 이제는 빛이 바랜 오래된 청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앨범에 담긴 곡들의 질감은 현재가 아닌 지나간 여름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2005년 5월 서울 올림픽 공원 잔디마당에서 CT 재즈 페스티벌이 개최되었었다. 이틀간 펼쳐졌던 여러 재즈 공연들 가운데 그 마지막은 바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John Pizzarelli가 장식했다. 이 날 공연에서 그는 자신의 애창곡 가운데 상당수의 보사 노바 곡을 포함시켰는데 5월이기에 약간 이른 감이 있었지만 한 밤에 공원 잔디에 편히 앉았던 연인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날 불렀던 보사 노바 곡들은 모두 지난 해 발매된 <Bossa Nova>(Telarc 2004)라는 앨범에 수록된 것이다. 사실 존 피자렐리의 음악은 여름보다 가을과 겨울에 더 어울리는 것이었다. 집시 풍의 스윙 재즈 기타를 연주하며 여성스러운 부드러움으로 나긋나긋 노래하는 그의 음악은 실내를 훈훈하게 달구는 모닥불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보사 노바 앨범부터 그는 5월의 싱그러움에서 출발하여 푸른 하늘을 향해 분수가 시원하게 솟아오르고 그 아래를 꼬마들이 작은 배를 띄우며 놀고 있는 여름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긋나긋 감미롭게 노래하는 것은 같지만 살랑거리는 보사 노바 리듬은 그의 음악적 분위기를 확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올 해 발매된 <Knowing You>(Telarc 2005)에서도 반복된다. 보사 노바 대신 스윙 리듬을 배경으로 노래하고 있는데 이전 음악과 유사하지만 분명 그의 음악은 열대야가 이어지는 여름 밤의 낭만에 가까워 졌다.
보사 노바 리듬을 배경으로 노래하는 앨범 가운데 필자는 Lisa Ekdahl의 <Sings Salvador Poe>(BMG 2000)만큼 시원하고 싱그러운 앨범을 들어본 적이 없다. 스웨덴 출신의 귀엽고 바삭거리는 목소리를 지닌 이 여가수가 부르는 보사 노바 곡들은 한없이 가벼우며 한없이 싱그럽다. 게다가 이제는 그녀의 사랑이 되어버린 살바도르 포의 음악이 지닌 감미로운 멜로디 또한 여름의 더위를 씻어주는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혹시 카리브해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필자 역시 카리브해에는 가보지도 못했고 지리에 능하지 못한 터라 어디쯤에 붙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Andy Narell의 <The Passage>(Heads Up 2004)를 들으면 막연한 이미지의 카리브해가 하나의 선명한 사진처럼 머리 속에 그려진다. 스틸 팬이라고 타악기지만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음가를 표현할 수 있는 특이한 이 악기는 카리브해에서 만들어진 악기다. 바로 앤디 나렐은 이 악기를 연주하는데 그뿐만 아니라 Calypsociation이라는 그룹 역시 음역이 나누어진 스틸 팬을 연주하여 하나의 오케스트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시원하게 울리는 철판에서 생긴 멜로디들을 듣다 보면 해초가 보일 정도의 맑고 푸른 바다와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섬, 그리고 그 속에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감상자 자신을 상상하게 된다.
앤디 나렐이 카리브 해변을 그리고 있다면 피아노 연주자 Monty Alexander의 <Rock Steady>(Telarc 2004)는 스카와 레개로 유명한 자마이카의 해변으로 감상자를 안내한다. 원래 자마이카 출신으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그의 자마이카 친구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 앨범은 그의 지우이자 역시 자마이카 출신인 기타 연주자 에르네스트 랑글린이 참여하여 “스카~스카~”하는 멋진 여름용 기타 연주를 펼친다.
최근에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일렉트로니카 라운지 음악의 특징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렉트로닉 리듬을 기반으로 재즈와 라틴의 향취가 적절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스타일의 음악은 재즈 쪽에서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여름용 앨범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이탈리아의 라운지 음악 전문가 Nicola Conte의 <Other Directions>(Blue Note 2004)은 의외로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사용하지 않고 긴장을 이완시키는 멋진 라운지 풍의 재즈를 들려준다. 독일의 쳇 베이커라는 트럼펫 연주자이자 보컬인 틸 브뢰너와 다양한 이탈리아 재즈 연주자들이 참여한 이 앨범은 흔들리는 라틴 풍의 어쿠스틱 리듬을 기반으로 부드럽고 달콤한 여름 밤용 음악을 풀어나간다.
이상 라틴 풍의 이국적 사운드를 담고 있는 여러 앨범들 가운데서 듣기 편한 앨범들을 소개해 보았다. 사실 이런 앨범들은 이국적이기 때문에 여름 휴가용으로 적합한 앨범들임에 분명하지만 그래도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음악을 듣고 음악이 주는 이미지를 느끼며 상상하는 감상자 자신이다. 즉, 주관적이고도 적극적인 감상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번 올 여름 바다나 산에서, 아니면 시원한 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이 앨범을 들으며 그 이미지를 상상해 보자. 그 자체로 멋진 여름의 추억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오호..제가 찾던 음악들이 여기 있었네요!
집에서 휴가를 보내야만 하는 저에게는..정말 고마운 포스팅입니다.^^
폴 데스몬드 앨범..아..정말 좋네요! 개인적으론 스탄겟츠 앨범보다 좀 더 담백한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듭니다.
뭔가 뿌듯한 여름휴가를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ㅋ
오래 전에 쓴 글이라 앨범이 살짝 올드래지기조 했습니다. 그래도 휴가엔 제격이죠. ㅎ 요즈음은 벅스나 멜론에 제가 추천한 앨범들이 좀 있습니다. 참고 하세요. ㅎ
벅스에 가보니, 좋은 앨범들이 많네요.^^
특히, 파올로 프레주는 처음 듣는데 자꾸만 듣게 됩니다.
이 이탈리아 트럼펫 연주자 참 매력적이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