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키스 자렛 트리오를 언급할 때 많은 사람들이 스탠더드 트리오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그것은 1983년 트리오의 첫 앨범 <Standard 1>(ECM)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기존의 스탠더드 곡들을 트리오만의 색으로 해석해 나가고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 본다. 그러나 이런 표현으로 인해 이 트리오에 대해 상대적으로 가리워진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이 트리오의 연주에 내재된 프리한 부분이다. 사실 이 트리오를 단번에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한 첫 앨범 <Standard 1>과 <Standard 2>가 날 녹음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같은 날 또 다른 앨범이 녹음되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앨범의 제목이 <Standard 3>가 아닌 <Change>라는 다른 제목을 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앨범이 스탠더드가 아닌 트리오만의 곡과 자유 연주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키스 자렛 트리오의 시작은 처음부터 두 개의 축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탠더드 연주에 대한 호응으로 인해 자유연주의 측면은 부각되지 않았다. 1989년 작 <Changeless>(ECM)만이 이후 발표되었을 뿐이다.
일전 프랑스의 한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신기하게도 나는 우리가 연주하는 것이 아방 가르드에 속한다는 느낌이 든다.’라고 자렛이 밝힌 적이 있다. 그것은 세 연주자의 집단 즉흥 연주를 두고 한 말이겠지만 당시 인터뷰에서 현재의 프리재즈에 대해 반감을 표시했던 터라 다소 모순이 되는 이 발언에 내심 놀라기도 했었다. 그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을까? 이번 앨범에서 세 명의 대가는 이제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아쉬워 하고 있었던 트리오의 또 다른 축인 즉흥 자유연주를 화두로 삼았다.
사실 이런 연주를 트리오가 몇몇 스탠더드 연주에서 ‘extention’의 형식으로 펼쳤던 테마를 자유로이 벗어나는 연주형태와 연관을 지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전개 양식을 살펴본다면 기존의 자유연주 방향과는 다른 면이 발견된다. 같은 부류의 앨범 <Change>나 <Changeless>에서의 방향과도 다르다. 이번 앨범에서 펼쳐지는 즉흥 연주는 진행 방식에 있어서 자렛의 즉흥 솔로 연주 앨범의 방식에 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전의 진행 양식이 스탠더드였건 자렛이 정한 것이었건 하나의 구조를 상정하여 그 구조를 지속시키면서 그것을 점진적인 방식으로 연장하고 확장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그 속에는 일종의 순환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의 동기나 구조자체가 끝까지 지배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등장하는 새로운 동기와 형식에 의해 대체되는 수평적, 선적인 양상을 보인다. 그래서 첫 곡 ‘From The Body’를 예를 들면 블루스로 시작한 연주가 다양한 변화를 거듭해 말미에서는 가스펠적인 요소위에 자렛 특유의 서정과 긴장이 융합된 스타일로 바뀐다. 이런 점들은 자렛의 즉흥 솔로 앨범에서 익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이것이 자렛 혼자가 아니라 트리오 연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앨범은 한편으로는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이런 끊임없는 장시간의 연주를 다 소화해내지 못하고 일부만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두 장으로 발매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러나 이 점이 앨범의 가치를 하락시키지는 않는다.)
트리오 연주이기에 전체 진행을 즉흥 솔로에서의 양상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자렛은 자신 혼자 다 해결하려는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그 예로 그의 피아노는 대부분 왼손을 자제하고 오른손을 주로 사용하여 멜로딕한 부분을 자유로이 시간에 따라 발전시키는 연주를 보인다. 그리하여 Gary Peacock의 베이스가 독자적인 연주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피콕의 단단하면서 공격적인 면을 보이는 베이스라인은 자렛의 오른손에 대한 대위적이고 화성적인 답변이다.
자렛의 왼손은 주로 연주의 흐름에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에서 부각되는데 여전히 그 코드운영의 섬세함에 놀라게 된다. 이런 왼손의 역할은 긴박하게 진행되던 흐름을 늦추고 강박적인 패턴을 만들어 내며 자렛의 오른 손이 새로운 방향을 설정할 때까지 시간을 지속시키는데 있다. 그리하여 변화는 매우 점진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상이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하나의 공간에 모일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실제 음악이 연주된 물리적 시간과 감상자가 느낀 심리적 시간사이에 차이가 발생한다.
83년 이후 줄곧 함께 해온 연주자인지라 이들의 호흡은 완벽에 가까운 일치를 보인다. 오랜 시간동안 서로의 연주 스타일을 이해했다고 해서 상투적 패턴만을 반복하지도 않는다. 각 멤버의 역할은 시간에 따라 역할이 바뀌는데 그래서 간혹 세 연주자가 트리오라는 틀을 벗어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것은 주로 피콕의 베이스와 자렛의 피아노간의 관계 설정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자렛을 중심으로 볼 때 피콕의 베이스는 자렛과 대립하여 공간을 분할하다가도 자렛을 부각시키고 뒤로 숨어 버리기도 한다. 특히 분위기의 반전이 자렛의 왼손에 의해서 시도될 때에 이런 장면이 자주 연출되는데 이런 부분이 이들의 연주가 전혀 계산된 것이 아닌 완전한 즉흥 연주임을 확신하게 한다. 한편잭 드조넷의 드럼은 거의 모든 시간동안 편재하면서 다른 두 동료를 감싸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 앨범은 키스 자렛의 완전한 재기를 알리는 앨범임에 틀림없다. 지난해 발표한 <Whisper Not>의 경우 키스 자렛의 건강 상태로 말미암아 무리하지 않고 스탠더드의 텍스트성을 존중하는 면이 강한 연주를 보여주었다면 이번 앨범에서는 마음껏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신에 있어서는 초기의 짱짱한 실험정신을 되살아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아직까지 키스 자렛의 새 앨범은 언제나 새롭고 이벤트적인 성격을 잃지 않는다. 충격과 경이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