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in Of Days – Silje Nergaard (Sony 2015)

한층 깊어진 서정으로 다가오는 담백한 위로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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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재즈를 듣는다. 근 30년이 되어간다. 이를 바탕으로 재즈에 관한 글도 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재즈를 부담 없이 듣는 것에 대해 부러움을 느낀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내가 조금은 더 다양한 음악을 편안하게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재즈는 물론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은 음악 감상, 아침엔 클래식, 오후엔 포크나 팝, 저녁엔 재즈를 듣는 식의 마음 가는 대로 이것저것 듣는 음악 감상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나의 바람은 재즈라는 한 장르에 충분히 빠졌기에 가능한 것일 수 있다. 누구나 가지 못한 길을 꿈꾸니까. 한편으로는 내가 특정 장르만으로는 충족할 수 없는 나만의 음악을 갈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직접 음악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음악을 감상한다고 할까?

실제 음악인들은 평생에 걸쳐 자신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다. 전 장르를 걸쳐 성공한 연주자나 보컬들을 보면 장르를 초월해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설령 한 장르에 평생을 바쳤다 해도 그들은 그 안에서 남들에 앞선 새로운 영역을 탐구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음악적으로 자유로웠던 사람들인 것이다.

노르웨이 출신의 여성 보컬 실예 네가드도 그런 경우이다. 현재 그녀는 재즈 보컬로 분류되고 있지만 그녀의 창법이나 음악은 전형적인 재즈와는 궤를 달리한다. 팻 메시니가 함께 했던 첫 앨범 <Tell Me Where You’re Going>(1990)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던 ‘Be Still My Heart’를 수록한 앨범 <At First Light>(2001), 빈스 멘도사가 이끄는 메트로폴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앨범 <A Thousand True Stories>(2009) 등을 통해 그녀는 재즈는 물론 북유럽의 서정이 드러나는 포크와 달콤한 팝을 혼용한 음악을 들려주어왔다. 그렇다고 재즈와 다른 음악을 섞는 식의 실험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음악 양식의 사용은 오로지 그녀의 음악적 감성에 따른 것이었다.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곤란한, 실예 네가드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유롭게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재즈와 팝 쪽 모두에서 인기를 얻어왔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도 마찬가지다. 이번 앨범에서 그녀는 이전앨범들에서 들려주었던 것처럼 재즈, 포크, 팝이라는 재료를 북유럽의 서정적 감성에 버무려 낸, 그녀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편안하고 긍정적인 음악을 들려준다. 이렇게 말한다고 자기 반복적 음악일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1966년 생으로 어느덧 50을 앞 둔 시기이기 때문일까? 노래에 담긴 서정과 위로의 정서는 더욱 깊어졌고 음악적 매무새는 더욱 섬세하고 매끄러워졌다. 그녀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보컬에 집중된 것이 아닌 목소리와 연주가 어우러져 하나가 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먼저 수록된 열한 곡 가운데 80년대 세계적 인기를 얻었던 노르웨이 팝 그룹 아하의 ‘Hunting High & Low’의 리메이크를 제외하고는 전 곡을 실예 네가드 본인이 작곡된 것을 말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그녀는 1년에 걸쳐 곡을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 그녀의 감성이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앨범 타이틀이 가사로 등장하는 곡 ‘The Leaving’이 대표적이다. 이별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노래는 슬픈 동시에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의 정서가 빛을 발한다. ‘Be Still My Heart’를 들으며 우리가 느꼈던 담백한 멜랑콜리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역시 이별을 주제로 한‘A Crying Shame’이나 이별 후의 홀로된 감정을 풀어낸‘Those Rainy Night’, ‘Café De Flore’ 등으로 이어진다. 이들 곡에서 그녀는 우리를 슬픔으로 이끌지만 결코 그 안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슬픔에 젖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일상을 긍정할 수 있는 밝음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러한 위로와 치유의 분위기는 분명 완숙의 단계에 접어든 그녀의 삶의 영향이 크다.

함께 한 연주자들과의 안정적인 호흡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소니로 이적한 이후 크리스마스 앨범 <If I Could Wrap Up A Kiss>(2010)과 <Unclouded>(2012)에서 함께 했던 두 명의 기타 연주자 할그림 브랫베르그와 호베어 벤딕슨이 이번 앨범의 질감을 결정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곡 ‘Buckle Her Shoe’가 좋은 예이다. 북유럽의 민속적 색채가 단순 반복적인 선율에 담겨 있는 이 곡에서 두 연주자는 스피커의 좌우를 차지하고 입체적이고 아름다운 화학작용으로 보컬에 스며든다. 블루지한 맛이 살아 있는 ‘Two For The Road’, 목가적인 분위기의 ‘Com Walk Around’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영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Lady Charlotte’의 작곡에 참여하기도 한 베이스 연주자 아우둔 얼리엔과 앨범의 제작과 드럼 피아노 기타 등을 연주한 안데르스 엥엔도 여백이 편안한 사운드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벤딕 호프세스(색소폰), 아르베 헨릭센(트럼펫), 헬게 리엔(피아노) 등 그녀와 오랜 시간 우정을 나눈 연주자들도 적재적소에 등장해 앨범의 완성도에 일조했다. 또한 빈스 멘도사는 앨범에서 유일하게 노르웨이어로 노래한 ‘Morgenstemning 아침 분위기’의 합창 편곡으로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럼에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커트 엘링의 참여가 아닌가 싶다. 그는 ‘The Dance Floor’에서 그윽한 중저음으로 소녀 같은 실예 네가드와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사랑의 낭만적 세계를 표현했다. 그 결과 대중적으로는 이 곡이 가장 큰 사랑을 받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 80년대 팝에 대한 향수가 있는 감상자들은 아하의 ‘Hunting High & Low’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겠다. 그녀는 영국에 머물 때 아하를 알게 된 이후 계속 그룹의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1991년 앨범 <Silje>에서 그룹의 보컬 모튼 하켓과 듀오로 한 곡을 노래하기도 했다. 특히 ‘Hunting High & Low’를 매우 좋아해 이렇게 다시 노래하게 되었는데, 아르베 헨릭센의 건조한 트럼펫과 두 기타 연주자의 신비로운 연주를 바탕으로 그녀는 마치 자신의 곡인 양 앨범의 다른 곡들과 마찬가지로 담백한 서정을 담아 노래했다.

끝으로 앨범의 훌륭한 매무새에는 녹음 방식도 영향을 주었다. 앨범의 첫 녹음은 평소처럼 목소리와 악기들을 각각 깨끗하게 녹음하기 위해 각 연주자들이 유리로 된 칸막이를 두고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평소와 다른 불편함을 느꼈다. 자신이 곡마다 부여한 감정이 잘 살아나지 않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과장하게 모든 장벽을 치우고 스튜디오 한 가운데서 공연을 하듯 녹음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또한 헤드폰을 벗어 던지고 연주자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를 직접 들어가며 노래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전 14장의 앨범을 녹음할 때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과 안정, 그리고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이전 앨범들을 불편한 상황에서 녹음했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음악과 목소리를 이제서야 찾은 듯한 느낌! 그것이 그대로 음악에 투영되었으니 앨범이 편안함과 위로의 분위기를 지니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번 앨범에 담긴 음악적, 정서적 깊이는 세심한 준비가 바탕이 되기는 했지만 그 전에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만의 음악에 집중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분명 그녀는 앨범마다 자신의 현재에서 가장 최선인 음악을 담아냈다. 하지만 대중적, 상업적으로는 <At First Light>이 여전히 대표작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앨범이 이를 대치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 본다. 물론 음악 외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이번 앨범이 다른 그녀의 앨범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라는 것,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이를 기원하며 ‘The Dance Floor’를 다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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