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lflower – Diana Krall (Verve 2015)

팝을 듣던 시절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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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나 크롤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재즈 보컬입니다. 다섯 개의 그래미상, 8장의 앨범이 발매 첫 주에 빌보드 재즈 차트 1위에 오른 기록들만 봐도 그녀의 인기가 얼마나 큰 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무조건 대중적 인기를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부터 즐거운 음악, 재즈인의 숙명을 따라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거듭해왔습니다. 성공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실제 벨벳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기분 좋은 결이 느껴지는 그녀의 음색과 오스카 피터슨에 기원을 두고 있는 피아노 연주가 주는 음악적 깊이와 매력은 다른 누구와 대체할 수 없는 그녀만의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녀는 냇 킹 콜 트리오, 보사노바, 빅 밴드 재즈, 1920년대 보드빌 사운드 등을 가로지르는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모든 앨범들은 다이아나 크롤이라고 하는 피아노 연주자겸 보컬이 지닌 변하지 않는 매력을 기본으로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이 20년이 넘는 그녀의 인기를 가능하게 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이번 앨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앨범에서 그녀는 196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는 팝의 명곡, 히트 곡들을 노래함으로써 의외의 선곡이라는 신선함을 느끼게 하는 한편 그 곡들을 자신의 스타일로 노래함으로써 친근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사실 재즈 연주자나 보컬이 팝을 노래하는 것은 이제 그리 새롭거나 흥미로운 일이 아닙니다. 원래 재즈의 근간을 이루는 스탠더드 곡이란 것이 인기를 얻었던 뮤지컬, 영화 음악 등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스탠더드 곡들이 워낙 자주 연주되고 노래되면서 진부한 느낌을 주는 한편 시간의 흐름 속에 당대의 감상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스탠더드 곡들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많은 연주자와 보컬들이 팝을 노래해왔습니다. 다이아나 크롤만 해도 버트 바카락의 곡으로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노래로 인기를 얻었던“Look Of Love”, 빌리 조엘의“Just The Way You Are”, 탐 웨이츠의 “Temptation”, 조니 미첼의 “Black Crow”같은 팝 곡들을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번 앨범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시도되어 마마스 &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을 시작으로 이글스의 “Desperado”, “I Can’t Tell You Why”. 레온 러셀의“Superstar”, 길버트 오 설리번의 “Alone Again”, 엘튼 존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10CC의 “I’m Mot In Love”, 크라우디드 하우스의 “Don’t Dream It’s Over”등 원곡으로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들어도 괜찮을 법한 설명이 필요 없는 명곡, 그리 팝 음악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들으면 “아하~ 이 곡”할 정도로 익숙한 곡들이 다이아나 크롤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이아나 크롤이 팝을 노래한 것은 단순히 수 없이 노래했던 스탠더드 곡들에 싫증이 나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의미가 훨씬 강합니다. 1964년 생으로 재즈가 대중 음악의 중심이 아니었던 시절에 유년기를 보낸 그녀는 그 시절 라디오나 음반으로 당대의 히트 곡들을 듣고 따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번 앨범에서 그녀가 노래한 곡들은 그렇게 어린 시절의 소소한 추억을 담고 있는 곡들입니다. 예를 들면 “Desperado”는 이글스가 아닌 린다 론스타드가 부른 버전을 아버지와 함께 좋아했던 추억을,“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는 오스카 피터슨 만큼이나 우상으로 삼았던 엘튼 존의 음악을 사랑했던 추억을, “Don’t Dream It’s Over”는 캘리포니아 파사데나의 작은 아파트의 바닥에 누워서 반복해서 들었던 22세 무렵의 추억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I’ll Take You Home Tonight”은 이번에 새로이 공개되는 폴 매카트니의 곡으로 2012년 폴 매카트니의 앨범 <Kiss On The Bottom>에 다이아나 크롤이 참여하면서 듣고 반했던 곡이라 합니다. 그리고 타이틀 곡 “Wallflower”는 원곡자인 밥 딜런의 데모 버전을 듣고 좋아한 이후 앨범을 녹음하기 전까지 공연에서 종종 불렀던 곡이라 합니다.

이처럼 이미 잘 알려진 곡들이지만 그 곡들은 다이나아 크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모든 곡들을 그녀는 지난 시절을 회상하듯 원곡보다 느리게 노래합니다. 특히 마지막 음의 여운을 길게 가져가 애상의 정서를 더욱 깊게 느끼게 해줍니다.

다이아나 크롤이 자신의 아련한 과거를 담고 있는 곡들을 노래한 것은 이미 지난 앨범 <Glad Rag Doll>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20년대 보드빌쇼를 모델로 한 듯한 이 앨범에서 그녀는 집 한 켠에 쌓아둔 오래된 78회전 SP 앨범들 가운데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들으며 즐겼던 곡들을 골라 노래했었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의 재현이라는 고증적인 느낌이 강해 감상자에게까지 그녀의 추억에 공감하게 하는 부분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이전에 비해서는 그 정도가 좀 덜했습니다. 그에 비해 자신의 추억과 대중적 측면이 어우러진 이 앨범은 이전의 성공 이상의 큰 호응을 받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번 앨범의 대중적 매력에는 제작을 담당한 데이빗 포스터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현재 버브 뮤직 그룹의 사장이기도 한 그는 이미 알려졌다시피 비지스, 디온 워윅, 마이클 잭슨, 시카고,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 마돈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비욘세 등 팝 역사를 빛낸 수 많은 보컬과 그룹의 앨범을 제작한 팝계의 거물 제작자입니다. 다이아나 크롤의 앨범에서도 그는 자신의 대중적 감각을 잘 반영했습니다. 원곡의 멜로디를 과하게 변경하지 않고 다이아나 크롤의 여러 앨범들처럼 오케스트라를 사용했지만 그 움직임을 매우 조심스럽게 한 편곡이 대표적입니다. 이 편곡은 원곡을 함께 생각하게 하면서도 다이아나 크롤의 개인적인 성격이 곡마다 잘 배어들게 하는 효과를 냈습니다. 한편 길버트 오 설리번“Alone Again”을 제목과 달리 역시 그가 키운 보컬 마이클 부블레와 듀오로 노래하게 하여 회상조의 분위기 속에서 원곡의 상큼한 낭만을 유지하게 만든 것. 랜디 뉴먼의 “Feel Like Home”에서 다이아나 크롤이 어린 시절 좋아했다는 브라이언 아담스를 참여시킨 것, “Wallflower”에서 블레이크 밀스의 목가적인 기타를 현악 앙상블 사이에 자리잡게 한 것도 원곡의 매력이 자연스레 다이아나 크롤의 매력과 어울리게 합니다.

데이빗 포스터의 제작으로 인해 다이아나 크롤의 이전 앨범들에 비해 재즈적인 맛이 줄고 팝적인 맛이 강해졌다고 불평하는 감상자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음악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이아나 크롤의 정체성은 변함이 없다는 것, 나아가 다른 어느 앨범보다 친밀하고 개인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이러한 우려를 뒤로 물러서게 합니다. 아마도 많은 감상자들은 여전히 달콤하고 부드러운 다이아나 크롤만의 분위기에 빠진 가운데 자신만의 추억을 들추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앨범에서 그녀가 부른 팝 히트 곡을 잘 알고 있는 감상자라면 어느덧 흘러간 시간을 느끼며 색다른 감회에 젖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재즈 보컬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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