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quility – 김주환 (Johnny Company 2014)

여백을 활용한 노래가 전달하는 일상의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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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말 김주환이 새로운 앨범 녹음을 완성했다며 마스터를 보냈다. 결과물을 확인하기도 전에 나는 노래에 대한 그의 욕심이 참으로 대단함을 느꼈다. 지난 2012년 10월에 첫 앨범 <My Favorite Things>를 선보인 이후 그는 6개월만에 두 번째 앨범 <The Best Gift>를 발표했고 다시 10개월 뒤인 올 2월에 세 번째 앨범 <Warm Like Love>를 선보였다. 그리고 다시 10개월 뒤에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을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 대단한 속도이다. 특히 시장이 크지 않은 한국 재즈에 있어서는 보기 드문 속도이다.

물론 과거에는 한 해에 여러 장의 앨범을 녹음하고 발표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 녹음해서 여러 장의 앨범을 발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를 가로지르는 주제를 요구하고 이를 중심으로 한 일관된 사운드를 필요로 하는 요즈음의 앨범 제작 상황에서는 1년도 안되어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다. 제작 비용도 그렇지만 새로운 주제를 설정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매진하려면 대단한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주환은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기본적으로 노래를 하는 것, 앨범 녹음하는 것을 다른 누구보다 즐기고 있기에 가능했다. 사실 이번 네 번째 앨범의 경우, 세 번째 앨범의 제작을 마친 이후 곧바로 구상을 시작했다. 그래서 10개월 만에 앨범 제작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앨범을 제작하는 속도가 아니다. 빠른 제작과정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탄탄해지는 앨범의 매무새이다. 특히 이번 앨범은 이전 앨범들보다 그 완성도가 높다. 빠름과 느림이 적절히 요철을 만들어 내는 극적인 흐름 속에 균질한 힘이 끝까지 유지된다. 하나의 주제를 설정하고 이를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김주환의 음악적 의지가 굳건한 결과이다. 김주환 자신이 직접 제작의 모든 과정을 총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무엇보다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려 했다고 한다.

자신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오로지 자신에 집중해야 한다. 침묵의 공간에서 홀로 서서 자신의 소리를 내야 한다. 그래서일까? 이번 앨범에서 그는 아홉 곡 가운데 네 곡‘Where Do You Start?’ ‘Love Is Still The Answer’. ‘Love Is Still The Answer’, ‘This House Is Empty Now’. ‘Blame It On My Youth’을 피아노나 기타 솔로만을 곁에 두고 노래했다. 보컬의 특성상 무반주로 노래하는 것이 흔하지 않은 일이라 할 때 자신의 노래가 있는 그대로 드러날 수 있는 최소한의 편성을 사용한 셈이 된다. 실제 이들 곡은 폭 넓은 음역, 원곡의 이미지를 배경에 두면서도 이를 자신의 노래로 만드는 섬세한 표현력 등 그의 장점, 매력을 가장 잘 느끼게 해준다. 실제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Where Do You Start?’에서는 토니 베넷의 넉넉함을 자기식으로 바꾼 듯한 자신감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인 버트 바카락의 곡을 노래한‘This House Is Empty Now’와 ‘Love Is Still The Answer’에서는 정서의 파고를 자유로이 이끄는 힘을, ‘Blame It On My Youth’에서는 마치 실연을 당하기라도 한 듯한 여리고 섬세한 표현력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곡은 편성상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공간감이 또 다른 매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나머지 다섯 곡도 편성은 다르지만 크게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넉넉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위에서 언급한 김주한의 매력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Our Love Is Here To Say’와 ‘Fly Me To The Moon’, ‘Pick Yourself Up’에서의 댄디한 신사를 연상시키는 느긋한 미소, ‘Cry Me A River’의 낭만으로 치환된 슬픔, 앨범에서 가장 빠른 템포인 ‘My Heart Belongs To Daddy’에서의 날렵한 움직임에서도 곡예사처럼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균형감 등 각각의 곡들은 저마다의 매력을 발산한다.

한편 김주환의 강렬한 매력이 다른 어느 때보다 잘 드러날 수 있었던 것에는 기타 연주자 탁경주가 담당한 편곡의 힘이 컸다. 그는 연주자답게 솔로나 쿼텟이 반주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게 하면서도 보컬이 자연스레 전면에 드러나도록 했다. 어찌 보면 모순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러한 설정이 가능했던 것은 역시 여백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가령 앨범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 생각되는‘Blame It On My Youth’에서 탁경주의 기타는 아련한 인트로 연주로 곡의 전반적 분위기를 제시한 후 김주환의 미려한 노래 뒤로 살짝 물러났다가도 사이사이 여백이 발생할 때마다 감각적으로 앞으로 나서기를 반복한다. 쿼텟 연주의 경우 ‘Cry Me A River’가 대표적이 아닐까 싶다. 기타 연주자의 편곡답게 여백을 살린 느린 연주로 유명한 기타 연주자 그랜트 그린의 명곡 ‘Idle Moments’의 인트로를 절묘하게 차용한 이 곡에서 쿼텟 연주는 솔로 연주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컬에 대응한다. 보컬의 뒤에 선 뒤 솔로 연주와 달리 앞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대신 보컬과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함으로써 극적인 대비감을 연출해 노래와 연주 모두에 집중하도록 한다.

이처럼 노래와 연주 모두 여백을 적절히 활용했기에 앨범은 전반적으로 달콤한 여유를 느끼게 한다. 앨범 타이틀의 의미하는 ‘고요(皐陶)’의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나아가 앨범은 차분한 쉼에 멈추지 않고 김주환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노래를 듣는 우리에게 자신과 대면하는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꿈꾸게 한다. 늘 시간이 부족한 채로 빡빡한 하루를 사는 우리에게 잊고 있었던 자기만의 섬을 기억하게 한다. 그 섬에 대한 기억은 때로는 슬픔을 유발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락한 낭만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울게 되건 웃게 되건 아니면 웃음과 울음을 오가건 간에 앨범을 다 듣고 난 후에는 가슴 속에 얹혀 있던 것이 내려가는 듯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앞으로도 김주환은 과거의 유명 연주자나 보컬들이 그러했듯이 스탠더드 곡들을 차근차근 노래할 계획이다. 그에 따르면 스탠더드 곡들을 새로이 해석해 완성된 음악을 만드는 것이 무척이나 재미있다고 한다. 그것이 삶의 활력을 준다고 한다. 사실 나는 이런 그의 계획이 조금은 고루한 것이 아닌가, 자작곡을 그래도 노래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앞선 석 장의 앨범까지는 국내에 보기 드문 남성 보컬이라는 이유로 색다른 관심을 받을 수 있었지만 네 번째 앨범에서까지 반복된다면 식상한 느낌을 주지 않을까 걱정했다. 스탠더드 곡이 굳건하게 지닌 전형적 이미지에 갇혀 도약하지 못한 연주자나 보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이번 앨범을 통해 그는 확고한 방향성만 있으면 전형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자신과 곡에 어울리는 사운드를 찾아냈기에 앞으로도 익숙한 재료로 신선한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 멋진 보컬의 행적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어쩌면 이미 그는 새로운 앨범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갔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몇 개월 후 내게 넌지시 들어보라고 새로운 녹음을 건넬 지도 모르겠다. 그의 노래에 매료된 사람으로서 나 또한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그 전에 일단 이 앨범을 듣고 또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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