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rance – 고서이 (론뮤직 2014)

아련한 추억을 자극하고 오늘을 위로하는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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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현재는 자신의 뒤를 돌아보는 것에 인색하게 한다. 눈 앞에 펼쳐지는 많은 사건들을 받아들이기에도 우리의 시간은 벅차다. 하지만 나의 현재는 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나의 현재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오늘의 삶이 내 생각대로 잘 흘러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면, 방향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고 어디서부터 난감한 상황이 시작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현재를 살기도 바쁜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냐고? 삶의 사치가 아니냐고? 지난 시간이 너무 아파 다 잊고 싶다고? 만약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고서이의 이번 세 번째 앨범 <Remembrance>를 선택한 것은 무척이나 잘 한 일이다. <Melody Garden>(2008), <Dreaming Montmartre>(2010) 등을 통해 일상의 단상과 꿈을 정제된 선율로 표현해왔던 이 피아노 연주자는 이번 앨범에서 먼지가 뽀얗게 묻은 채로 켜켜이 쌓여 있는 우리의 지난 날을 추억하게 한다. 그렇다고 내가 서두에 어설프게 쓴 글처럼 ‘추억은 좋은 것이다, 그러니 추억하라’라는 식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 자신이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 겪었을 사건들, 느꼈을 감정들을 솔직하게 음악을 통해 표현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뒤를 돌아볼 것을 제안한다. 지시자가 아닌 안내자의 음악이랄까? 대단한 인물의 거창한 연설이 아닌 우리 곁의 평범한 누군가가 쉬운 언어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을 때 우리는 절로 그의 말에 귀 기울여 공감하고 급기야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지 않던가?

사실 이 앨범에 담긴 고서이의 음악은 다른 뉴 에이지 피아노 음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잔잔한 피아노 연주가 있고 간간히 스트링 사운드가 피아노 사이의 여백 사이로 솟아올라 정서적 효과를 배가하며 곡에 따라 하모니카, 기타 등의 다른 악기가 그녀와 함께 선율을 연주한다. 뉴 에이지라는 장르적 특성에 충실한 음악이다. 하지만 이런 음악을 들을 때는 사운드, 어법의 색다름이 아니라 그 편안하게 들리는 음악에 담긴 이야기에 있다. 그런 연주자의 개인적인 부분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 음악은 그저 카페에서 들리는 듯 마는 듯 흐르는 평범한 배경 음악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고서이는 꾸밈 없이 담백한 연주를 통해 자신의 추억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 추억은 어느 늦가을의 쓸쓸함(Late Autumn), 마음의 충만을 바랬던 그윽한 시간(A Little Prayer), 아침 이슬이 나뭇잎을 타고 기분 좋게 자유 낙하하는 풍경이 있는 상쾌한 아침(Morning Rondo), 고마운 사람(Song For You), 푸근하고 편안했던, 어쩌면 자신의 발등에 어린 딸(손녀)를 올려 놓고 같이 춤을 추었던 아버지(할아버지)(Oldman’s Dance), 그리운 사람들-나의 과거를 증명해줄-웃음을 담고 있는 사진첩(Photo Album) 같은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녀는 편안하게 당신의 지난 날은 어땠냐고 묻는다. 나도 내 이야기를 했으니 당신도 당신의 지난 날을 말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 또한 이 앨범을 들으며 처음에는 그녀가 자신의 어떤 추억을 바탕으로 각 곡들을 만들었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앨범 전체를 다 감상했을 때 나는 나의 지난 날을 돌아 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 살 때 햇살이 눈이 부시게 빛났던 어느 아침, 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난 오후의 나른한 정적에 담겨 있던 부드러운 행복감, 서로의 자리에서 행복하자며 나를 떠난 옛 연인의 희미한 웃음, 지금보다 더 어린 내 아이의 손을 잡고 동네를 산책하던 날 등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는 곱디 곱고 평온한 연주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리의 지난 날은 아름답고 낭만적이고 행복한 일들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시간은 고통을 완화하고 그 위에 아련한 그리움을 덧입힌다. 이번 앨범의 타이틀 곡 ‘Remembrance’도 이러한 시간이 흐르며 명도와 채도는 낮아졌을 지라도 그 덕에 오히려 따스한 빛을 내는 추억을 그린다. 우수가 어려 있으면서도 슬픔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 곡은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남겨진 기억에 감사하게 한다.

앞서 나는 당신이 지난 날을 돌아볼 시간이 없거나 돌아보고 싶지 않다면 이 앨범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제 그 이유를 알 것이다. 그렇다. 그녀가 우리에게 천천히 지난 날을 돌아보라 했던 것은 단순히 힘들었어도 어쩌면 그 때가 더 좋았을 지도 몰라.라는 탄식과 향수에 젖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추억이 오늘을 살게 하는 힘임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등 뒤로 아련하고 기분 좋은 기억만 남을 테니 오늘의 고단함을 견디자고 그녀는 음악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몽환적인 분위기의 아르페지오를 바탕으로 흐르는‘Romantic Dream’도 욕망이 투영된 헛된 바람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만나게 될 현실적인 꿈을 그린다.

‘Sailing Of Life’, ‘Waiting For Spring’같은 곡을 앨범 후반부에 배치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 두 곡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는 보통의 우리 일상이 실은 그 자체로 좋은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복잡하게 꼬여 있는 것 같고 뜻대로 되지 않는 오늘의 삶도 결국 다 지나가 봄처럼 온화하고 평온해 질 수 있음을 믿게 한다. 그래도 힘들다면 자신의 연주를 들으라고 한다. 시간은 흘러도 이 앨범에 담긴 음악은 지금처럼 영원할 테니. 자. 이제 당신이 기억을 지우고 싶거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앨범을 추천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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