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을 자극하는 추상화 같은 음악
기타 연주자 고로 이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브라질의 보사노바 명곡들에서 출발해 스탠더드 재즈 곡을 영국의 록 그룹 스타일 카운실의 곡까지 달콤하고 나른한 보사노바 스타일로 해석해오고 있는 나오미 & 고로에서의 그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실제 고로 이토가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들을 보면 무스 힐(Moose Hill)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보컬이나 연주자들과 함께 한 프로젝트 앨범들과 드라마 사운드트랙 앨범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성 보컬 나오미 후세와 함께 한 11장의 앨범이 음악적 중심을 이루고 있지 않나 싶다. 하라다 토모요, 아코디온 등의 앨범 제작을 거쳐 지난 해 보사노바 재즈의 명작으로 1963년에 세상에 선보였던 앨범 <Getz/Gilberto>의 발매 50주년 기념 헌정 앨범의 제작을 담당하게 된 것도 부드럽고 편안한 나오미 & 고로식 사운드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나오미 & 고로의 담백하고 잔잔한 음악을 생각하고 이 제작자이자 기타 연주자의 세 번째 솔로 앨범을 듣는다면 그와는 다른 질감의 음악에 놀라게 될 지도 모르겠다. 나오미 & 고로 시절의 보사노바, 팝적인 측면은 뒤로 물러서고 클래식과 재즈적인 면이 전면에서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적이면서도 악기들의 움직임과 어울림은 자못 역동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낯섦은 앨범의 시작과 중반, 후반에 위치한 ‘Opuscule’ 연작에서 시작된다. 기타, 피아노, 첼로, 클라리넷이 즉흥적으로 어울린 것을 여러 개의 부분으로 조각 내어 만든 이 곡들은 짧은 만큼 추상적이다. 그래서 확실한 멜로디에 익숙한 감상자들은 다소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짧은 연주들은 앨범 전체에서 작은 구분점을 형성한다. 실제 앨범은 하나의 ‘Opuscule’ 뒤로 두 곡이 묶여 있는-마지막은 하나- 네 부분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곡이 아닌 부분 단위로 앨범을 들어보기 바란다.
또한‘Opuscule’들은 각 부분에 있어 극적인 사건에 대한 전조(前兆) 역할을 한다. 각 ‘Opuscule’에 이어지는 ‘The Isle’. ‘Plate XIX’, ‘Blau Chian’, ‘Thyra’등의 곡을 들어보라. 이들 곡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앞에 놓인 ‘Opuscule’의 추상적 이미지에 의해 보다 고조된 극적인 서정성을 드러낸다. 특히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의 기획전 <Art & Air 하늘과 비행기를 둘러 싼 예술과 과학 이야기>를 위해 쓴 곡인 ‘The Isle’에 담긴 하늘을 유영하며 아래를 바라보는 듯한 비상의 이미지,‘Blau Chian’에 담긴 숙명적 슬픔의 분위기는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나오미 & 고로의 음악의 매력이었던 안락함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앨범이 매우 어렵다거나 듣기에 불편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운드의 질감이 낯설기는 하지만 앨범은 기본적으로 편안한 감상을 보장한다. 한국의 첼로 연주자 최정욱의 첼로 연주가 돋보이는 ‘Luminescence’에서의 우아한 비감(悲感), 고로 이토의 기타와 다카시 요시다의 클라리넷이 햇살 좋은 오후의 나른함처럼 다가오는 ‘Daisy Chain’, 순수한 사랑의 연가적인 맛이 강한 ‘Thyra’같은 곡들은 클래식이나 뉴에이지 음악을 좋아하는 감상자라면 매우 편안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고로 이토는 어떻게 이런 색다른 앨범을 녹음하게 되었을까? 일단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앨범이 고로 이토의 색다른 모험보다는 보사노바에 가려져 있었던 그의 음악적 취향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평소 그는 브라질 음악, 팝, 록 음악 외에 클래식과 재즈, 월드 뮤직 등을 아우르는 음악적 취향을 지녔고 그 가운데 음악을 담는 공간에도 많은 배려를 하는 ECM 레이블의 음악을 즐겨 듣는 듯하다. 실제 일본 HMV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 앨범의 탄생에 영향을 준 앨범으로 여러 ECM 레이블의 앨범을 언급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출신의 클래식 작곡가 발렌틴 실베스트로프가 자신의 곡을 직접 연주한 앨범 <Leggiero, Pesante>에서 세가지 형태로 연주된 ‘Postludium’은 이 앨범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같은 제목의 곡-미니멀한 기타를 중심에 두고 다른 악기들이 대비적인 움직임으로 편안함 속에서 긴장을 만들어 내는-을 직접 쓰고 이를 중심으로 앨범 전체를 구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고로 이토는 발렌틴 실베스트로프의 ‘Postludium’을 편곡해 자신의 첫 솔로 앨범 <Cloud Happiness>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앨범은 멜로디를 중심에 두면서도 여백을 상정한 작곡과 편곡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곡마다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조합을 이룬 기타, 피아노, 베이스, 드럼, 클라리넷, 첼로가 서로 어울리면서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게 하는 공간적 여유는 음악을 보다 깊고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한번 눈을 감고 음악이 연주되는 공간을 상상해 보자. 악기들이 옹기종기 모인 좁은 스튜디오가 아니라 충분한 거리를 두고 각 악기들이 산재한 넓은 공간이 떠오를 것이다.
편안하면서도 긴장을 담고 있는, 악기들의 아름다운 조화 뒤로 공간적 여백을 담고 있는 앨범에 담긴 음악은 들리듯 마는 듯한 일상의 배경 음악보다는 시간을 내어 홀로 조용히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하는 감상 음악의 성격이 더 강하다. 카페에 걸린 낭만적 사진보다는 갤러리에 전시된 상상을 자극하는 추상화에 가까운 음악이랄까? 자 그럼 이제 음악을 들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