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는 리치 바이라흐로 더 잘 알려진 피아노 연주자 리차드 바이라흐는 실력에 비해 다소 저평가된 면이 있다. 여기에는 세상의 무관심보다는 그의 그룹 활동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실제 모든 학업을 마치고 1972년 본격적으로 재즈 연주 활동을 시작했던 그는 스탄 겟츠 밴드를 잠시 거친 후 곧바로 색소폰 연주자 데이브 리브만의 그룹 룩아웃 팜 활동에 집중했다. 그리고 잠깐 리더 활동과 기타 연주자 존 애버크롬비의 쿼텟 활동을 병행하다가 다시 데이브 리브만의 새로운 그룹 퀘스트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다보니 그의 리더 활동은 상대적으로 덜 조명 받았다. 특히 ECM 레이블에서 녹음한 석 장의 앨범은 그의 피아니즘을 이해하는데 가장 효과적이고 중요한 앨범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언급했다시피 그는 1973년 데이브 리브만의 그룹 룩아웃 팜 활동을 시작했다. 이 그룹은 첫 두 앨범 <Lookout Farm>(1973)과 <Drum Ode>(1974)를 ECM에서 녹음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맨프레드 아이허의 눈에 띈 것일까? 룩아웃 팜 그룹의 <Drum Ode>를 녹음한 이후 그는 같은 해 룩아웃 팜의 동료 프랭크 투사(베이스), 제프 윌리엄스(드럼)과 함께 첫 리더 앨범인 <EON>을 트리오 편성으로 녹음할 수 있었다. 이 앨범에서 그는 빌 에반스식 서정에 현대적인 긴장-어쩌면 데이브 리브만과 함께 하면서 받은 영향일 지도 모르는-이 강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1976년 활동을 끝으로 룩아웃 팜이 해체되면서 리차드 바이라흐는 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이 바로 1976년 6월에 녹음된 <Hubris>다. 이 앨범을 그는 이제 자신은 아무 그룹에 속하지 않은 자유인이라 말하려는 듯 솔로로 녹음했다. 그 결과 리차드 바이라흐의 피아니즘이 가진 아름다움이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었다.
이 앨범에서 그는 빌 에반스에서 출발한 듯한 피아니즘을 펼친다. 이야기를 감춘 듯한 섬세하고 내성적인 왼손 보이싱과 이를 기반으로 중고역대를 중심으로 차분히 멜로디를 만들어 내는 오른손 솔로는 확실히 후기로 향해가던 빌 에반스의 1977년 <You Must Believe In Spring> 시절을 생각하게 한다. 아니 안으로 침잠하면서도 그 안에서 환상적인 방향으로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것을 보면 마크 존슨(베이스), 조 라바르베라(드럼)과 함께 파리에서 콘서트를 펼치던 2년 뒤의 빌 에반스를 미리 보는 것 같다.
사실 그는 평소 빌 에반스의 영향을 받았음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곤 했다. 예로 빌 에반스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1981년에 녹음한 헌정 앨범 <Elegy For Bill Evans>의 라이너 노트에서 그는 고인을 자신의 정신적 리더라고 칭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 또한 정규 클래식 교육을 오랜 기간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이너 보이싱을 비롯한 화성의 섬세한 부분을 탐구 하는데 관심이 있었기에 선배의 영향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리차드 바이라흐가 빌 에반스의 아류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선배의 피아니즘을 수용하긴 했어도 그는 다시 여기서 자신만의 피아니즘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보다 더 클래식적이며 상상을 자유로이 확장하는 연주,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는 연주였다. 이후 그의 대표 곡이 되어 리차드 갈리아노를 비롯한 여러 유럽 연주자들이 자주 연주하게 되는 ‘Leaving’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이 곡에서 그는 싱코페이션을 안으로 유지하면서 우수의 정서를 환상곡의 형태로 거대하게 발전시킨다. 이것은 분명 클래식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이 외에 일본어 공안(公案)의 영어 표기로 우리 말로는 선문답으로 해석되는 ‘Koan’은 긴장을 바탕으로 한 짧은 소절의 반복으로 이후 일본을 자주 방문하면서 빠지게 될 일본의 하이쿠(5-7-5 조로 정형화된 일본의 서정시)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왼손의 화성에서 뽑아 낸 테마와 이것의 환상적인 전개 또한 리차드 바이라흐만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정적이면서도 긴장을 결합하여 신화적 상상력의 세계로 나아가는 ‘Osiris’, ‘Hubris’, ‘The Pearl’같은 곡이 그러하다. 또한 앨범의 처음과 마지막에 배치되어 반복되는 한 주를 그리게 만드는-나아가 동양적 윤회까지 생각하게 하는 ‘Sunday Song’은 앨범에서 가장 서정적이며 단순, 담백한 형식의 곡으로 피아노 연주자의 서정성을 명확하게 느끼게 해준다.
한편 빌 에반스에서 출발해 보다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스타일의 연주는 ECM에서 녹음했기에 가능했던 측면도 있다. ECM의 피아니즘을 두텁게 했다고 할까? 실제 느린 속도로 여백을 적극 활용하며 명징한 톤을 극대화한 그의 연주는 그에 앞서 피아노 솔로 앨범을 녹음한 4명의 연주자 폴 블레이, 칙 코리아, 키스 자렛, 스티브 쿤의 연주에서도 발견된 것이자 이후 ECM에서 녹음한 여러 연주자들의 피아노 솔로 앨범에서도 반복될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연주는 물론 사운드의 측면에서도 이 앨범은 발매된 지 35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과거의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 앨범 이후 리차드 바이라흐는 1979년 존 애버크롬비 쿼텟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기타 연주자의 쿼텟 멤버이기도 했던 조지 브라즈(베이스)에 잭 드조넷(드럼)을 합류시킨 트리오 앨범 <ELM>을 녹음하게 된다. 여기서 앨범 타이틀 곡은 후에 그를 대표하는 최우선의 곡이 되었지만 이 앨범 또한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따라서 <Hubris>를 중심으로 두 장의 트리오 앨범 <EON>과 <ELM>을 듣는다면 이미 시작부터 견고한 개성을 지녔던 그의 피아니즘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앨범 첫 곡 Sunday Song 참 좋아합니다.
무언가 아련함 느낌이랄까요…아…정말 아름답네요..
아름답죠. 아련하면서도 전혀 오래된 느낌을 주지도 않고..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