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와 관련된 용어 가운데 판타지스타(Fantasista)란 말이 있다. 이탈리아로 된 이 용어를 사전은 ‘명사, (축구) 공격수’라고만 설명한다. 하지만 판타지스타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스스로 꿈을 꾸고 관주에게 환상을 선사하는 선수라고 할까? 믿기 어려울 지 모르지만 판타지스타는 단순히 골을 넣는 것을 넘어 그 골을 만들어 낸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바둑의 고수처럼 선수들의 패스 경로를 몇 단계나 예측하고 그 끝에 서 공을 받아 골로 연결시킨다. 즉, 마치 모든 것이 준비된 각본이기라도 한 듯 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획하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경기를 꿰뚫어 보는 마법 같은 힘을 지녔다고나 할까? 관중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로써는 아르헨티나의 공격수 리오넬 메시가 판타지스타에 가까운 선수가 아닌가 생각한다. 실제 동료들과 정교하게 패스를 주고 받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현란한 드리블로 상대 수비수들의 벽을 뚫고 기어이 골을 성공시키는 그의 경기를 보면 그 모든 것이 즉흥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메시의 경기를 보면 절로 아름답다는 말이 나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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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에서도 판타지스타가 있다. 키스 자렛이 그 주인공이다. 그의 연주는 순간적인 직관에 의한 솔로 연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꼼꼼한 악보나 사전에 연습한 대로 연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곤 한다. 순간적으로 앞선 멜로디를 잇는 멜로디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음을 연주하는 순간 앞으로 연주해야 할 내용 전체가 한꺼번에 떠올라 그것을 악보를 연주하듯 차근차근 현실화한 것 같다. 그래서 창조자가 아니라 음들의 혼돈 속에서 강력한 유대로 잠재(潛在)의 상태로 머물러 있던 음악에 빛을 비추는 발견자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곤 한다. 그만큼 완성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1975년의 <Köln Concert>로 대표되는 그의 솔로 콘서트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 싶다. 이 앨범에 담긴 연주는 모두 순간적인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를 때까지 그는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장시간 공을 들인 작곡만큼이나 완벽하고 아름답다.
그의 솔로 콘서트는 장시간의 즉흥 연주로 이루어진다. 한 시간 가량 쉬지 않고 순간의 감흥을 피아노로 표현하는 형식이기에 콘서트는 음악적인 측면을 생각하기 이전에 인간과 시간과의 사투 같은 느낌을 준다. 지금 멈추면 모든 것이 허물어지기라도 하는 양 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는 건반의 위아래를 오가며 끊임 없이 멜로디를 이어나간다. 실제 그는 콘서트가 시작되면 다음에 나가야 할 길을 찾는데 집중한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찾아야 할 길을 다 찾았다 싶으면 그는 연주를 마친다. 그렇기에 그의 솔로 콘서트는 끝을 향해 가는 여정(旅程)이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 그 여정에 따라 결과의 완성도가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토록 힘겹게 시간에 맞서며 앞으로 나가려는 데 우선적으로 집중했음에도 시간의 지속을 넘어 꿈틀거리듯 부단하게 변화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서사적인 흐름은 순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기적이다. 그러니 누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간단한 테마나 연주의 전반적인 분위기 혹은 흐름에 대한 스케치가 있으리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말 아무런 준비 없이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맞냐는 반복되는 질문들에 대한 그의 대답은 늘 같다. ‘그렇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다.’ 이 간결한 대답은 결국 그를 ‘판타지스타’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한편 그는 솔로 콘서트를 마치고 나면 그 연주를 잊으려 애를 쓴다고 한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연주였다고 해도 그것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는 이전 연주를 와해시키고 소실시켜 즉흥 솔로 콘서트를 해보지 않은 듯한 신선함을 유지하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 있다. 무대에 올라 피아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그날의 기분, 콘서트 홀에 흐르는 분위기에 따라 연주를 시작하는 것이야 말로 지난 연주와의 가장 훌륭한 이별일 수 있다. 그러므로 <Köln Concert>를 비롯하여 <Paris Concert>, <Vienna Concert>, <Solo Concert: Bremen & Lausanne>, <Sun Bear Concert>, <La Scala>, <Tokyo Concert>, <Testament>, <Rio> 등의 솔로 콘서트 앨범들은 그 도시에 대한 키스 자렛의 순간적 기록이자 과거의 건축물을 허물고 다시 새로운 건축물을 지으려는 의지의 기록인 셈이다.
한편 그의 즉흥 솔로 연주에는 클래식, 가스펠, 미니멀리즘, 블루스, 재즈 등 그가 경험한 모든 음악들이 등장한다. 또한 이들 음악들은 백화점 식으로 나열되지도 않는다. 다채롭게 결합하고 교차되어 연주 전체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많은 음악학자, 피아노 연주자들이 그의 솔로 콘서트에 학문적 관심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이 다양한 요소들이 순간적으로 정교하게 결합하는 것에 놀라 분석의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관심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매번 모든 것에 무지한 상태라 할 만큼 자신을 백지화한 후에 다시 순간에 의지한 채 연주를 펼치는 만큼 모든 연주가 순간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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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매번 새로운 건축물을 만들려고 하는 키스 자렛이 클래식 연주활동을 했다는 것은 다소 의외이다. 클래식은 다른 어느 음악보다 정해진 요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키스 자렛은 1970년대부터 이미 <In The Light>(1973), <Luminescence>(1974), <Arbour Zena>(1975), <The Celestial Hawk>(1980) 등 클래식적인 면-특히 작곡에서의-이 반영된 앨범들을 녹음했다. 또한 즉흥 솔로 콘서트에서 클래식적인 면을 종종 드러내곤 했다. 그래서 감상자들에게 이것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을 자극하곤 했다. 실제 키스 자렛은 1976년 그러니까 <Köln Concert>가 성공을 거둔 이듬해부터 클래식 피아노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뉴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에스토니아 출신의 클래식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의 앨범 <Tabula Rasa>의 수록곡 가운데 하나인 ‘Fratres(For Violin & Piano)’을 녹음하면서 맨프레드 아이허가 바이올린 연주자 기돈 크레머의 파트너로 키스 자렛을 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 키스 자렛은 바흐, 헨델, 모차르트, 쇼스타코비치 등의 클래식 곡을 녹음했다. 그런데 이들 클래식 곡에서의 연주는 맨프레드 아이허의 바람과는 달리 그다지 키스 자렛의 개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재즈를 연주할 때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들었다면 클래식에서는 반대로 바흐, 모차르트,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안에 자신을 무화 시키려는 듯한 연주를 펼쳤기 때문이다.
실제 그는 악보 상에 내재된 음악, 작곡가의 머리 속에 존재하던 음악이 그의 연주를 통해 투명하게 구현되기를 바랬다. 오로지 악보상에 기재된 음들이 있는 그대로 감상자에게 들리길 바랬다. 그런 이유로 그는 낭만파 음악에 그리 큰 관심이 없다고 한다. 낭만파 음악의 연주에는 음색이나 정서적인 부분에서 연주자의 해석이 어쩔 수없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연주자 자신을 사라지게 하고 오로지 악보에 담긴 플라톤 식 이데아만 남아 있는 연주가 가능한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평소 자신의 자유로운 감성에 기반한 즉흥 솔로 연주를 즐기는 재즈 연주자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의외다. 실제 1960년대 키스 자렛과 함께 트리오 활동을 했던 알도 로마노는 키스 자렛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재즈 연주자’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키스 자렛이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비전(Vision)이 반영된 자유로운 연주는 재즈에서의 연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 클래식 연주는 강한 자아를 투영하지 않으려는 모험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반영된 클래식 앨범들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호불호(好不好)가 극명하게 갈리곤 했다. 그 중 부정적인 의견들의 상당수는 그토록 개성적인 키스 자렛의 개성이 클래식 연주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재즈 애호가들 외에 클래식 애호가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 또한 어떤 식으로든지 연주자의 존재감이 연주에 투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아무리 출중해도 재즈 연주자로 규정된 사람이 클래식을 연주한다는 것에 대한 보수적 선입견 때문은 아니었다.
키스 자렛 본인도 결국 클래식을 연주할 때의 엄격함을 유지하는 것에 내면에서 모순을 느꼈던 것 같다. 1990년대 초반 이후 클래식 연주 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로 공연을 할 때 강렬한 느낌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는 세세한 음까지 다 알고 있는 곡을 일체의 변형 없이 연주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고 했다. 맛난 음식을 먹기 위해 지구 반대편까지 달려갔지만 마침 식당이 묻을 닫았음을 알았을 때의 느낌이랄까? 결국 그는 스스로 새로운 건축물을 만들고 그 안으로 감상자를 이끄는 판타지스타로서의 면모를 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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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월 게리 피콕(베이스), 잭 드조넷(드럼)과 함께 키스 자렛은 이틀에 걸쳐 11곡의 스탠더드 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이를 두 장의 앨범 <Standards Vol. 1>, <Standards Vol. 2>로 발매했다. 그동안 그가 자작곡을 연주하거나 즉흥 솔로 연주에 집중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분명 획기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트리오 연주는 다른 어떤 연주보다 먼저 기획된 것이었다. 맨프레드 아이허는 편지를 통해 앨범 녹음을 의뢰했을 때 트리오 앨범을 제안했다. 하지만 키스 자렛이 솔로 앨범을 원했기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로부터 12년 뒤 키스 자렛이 트리오를 결성하고 자작곡이 아닌 스탠더드 곡을 연주하게 된 것은 많은 재즈 연주자들이 자신의 음악적 길을 탐구한다는 이유로 타인의 곡, 특히 스탠더드 곡의 연주를 소홀히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젊은 연주자들의 상당수는 스탠더드를 연주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키스 자렛은 자신의 만든 곡이 아님에도 자신의 것처럼 몰입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스탠더드 곡의 소중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러한 생각은 연주자의 존재감을 최소화 하면서 곡 자체의 순수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의 클래식 연주와 정반대의 지점에 놓이는 것이다.)
실제 키스 자렛과 두 연주자들은 잘 알려진 스탠더드 곡들을 자유로운 연주로 자신들만의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렇기에 이미 존재했던 것을 반복한다는 식의 고루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보다는 과거의 새로운 현재화라는 느낌이 강했다. 과거 오스카 피터슨이 1950년대에 스탠더드 곡들을 그 시대의 감성을 반영하여 정리했듯이 키스 자렛 트리오의 연주는 이를 다시 현대적으로 쇄신한 것이었다.
또한 트리오의 연주는 즉흥 솔로 콘서트처럼 공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짐에도 스튜디오에서 사전 편곡과 여러 차례의 연주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착각하게 할 정도로 완벽했다. 게다가 무한한 상상력으로 테마를 새로운 차원으로 비상하게 하면서도 결코 과장된 느낌을 주지 않았다. 음 하나를 허투루 사용하는 법이 없이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최선의 음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 연주자의 호흡에서 트리오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보곤 했다.
따라서 키스 자렛의 스탠더드 연주는 이전의 즉흥 솔로 콘서트나 쿼텟 연주 등에서의 개방적인 연주와 결코 다르지 않다. 실제 키스 자렛은 트리오 연주를 펼치면서 종종 트리오가 아방가르드적인 연주를 펼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키스 자렛 트리오를 빌 에반스 트리오, 특히 스콧 라파로, 폴 모시앙이 있었던 전설의 트리오와 비교하곤 한다. 실제 키스 자렛 트리오의 유기적인 호흡은 많은 면에서 빌 에반스 트리오를 닮았다. 그러나 빌 에반스 트리오가 제시한 트리오 연주의 전형을 따르지 않은 트리오가 몇이나 있을까?
키스 자렛은 빌 에반스 트리오보다는 아마드 자말 트리오-특히 이스라엘 크로스비(베이스)와 베르넬 푸르니에(드럼)과 함께 했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0대 시절 그는 카운트 베이시와 데이브 브루벡을 통해 재즈에 빠진 이후 이내 오스카 피터슨의 현란한 기교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오스카 피터슨을 모방하곤 했다. 그러던 중 아마드 자말의 앨범을 듣고 기교를 넘어서는 연주, 매끄럽게 흐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연주, 자신의 상상력과 감성이 중심이 된 연주를 추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1963년도 앨범 <Poinciana>는 키스 자렛에게 연주자로서의 각성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니까 키스 자렛에게 아마드 자말은 판타지스타였던 셈이다. 공교롭게도 게리 피콕과 잭 드조넷 역시 아마드 자말의 <Poinciana>를 트리오 연주의 모범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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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키스 자렛은 판타지스타가 되었을까? 천재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를 만나야 하는 법. 맨프레드 아이허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는 판타지스타가 되지 못했거나 조금 더 때를 기다려야 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찰스 로이드 쿼텟의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던 무렵부터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확립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그를 그룹에 참여시켰던 것도 이를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 그룹에서 그는 칙 코리아에 이은 두 번째 키보드 연주자에 머물러야 했다. 게다가 찰리 헤이든, 폴 모시앙과 함께 한 트리오로 감상자를 매혹시키는 그의 능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음에도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레이블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중 태서양 너머 독일 뮌헨에서 편지가 왔다. 신생 레이블의 제작자는 진실을 담아 그의 솔로 앨범을 제작하고 싶다고 했다. 이에 마음이 움직인 그는 솔로 앨범 녹음을 하는 조건으로 1971년 11월 노르웨이의 오슬로로 건너갔다.
솔로 앨범 <Facing You>로 시작된 맨프레드 아이허와의 인연은 대단한 화학작용을 낳았다. 뛰어난 직관을 지닌 이 제작자는 그가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리고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얀 가바렉, 팔레 다니엘슨, 욘 크리스텐센과 함께 한 유러피안 쿼텟을 결성하게 된 것도 즉흥 솔로 콘서트를 하게 된 것도 모두 제작자의 기획이었다.
무엇보다 맨프레드 아이허는 젊음을 바탕으로 한 키스 자렛의 음악적 호기심과 모험심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키스 자렛은 물 없는 수영장에 다이빙을 하는 것처럼 무모하리만큼 거침 없이 자신의 음악적 영감을 현실화해 나갔다. 아메리칸 쿼텟 활동을 하면서 피아노 외에 소프라노 색소폰을 연주한 것, 자신의 집에서 수 차례의 오버 더빙으로 혼자 플루트, 색소폰, 타블라, 타악기 등을 연주하여 앨범 <Spirits>을 녹음한 것, 연주해 본 경험도 없는 바로크 오르간을 자기 식으로 연주하여 단번에 앨범 <Hymns/Spheres>를 완성한 것이 그 예이다.
한편 그의 녹음 및 연주활동 방식 자체도 모험적이었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그는 여러 개의 분열된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메리칸 쿼텟, 솔로 콘서트,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유러피안 쿼텟, 솔로 스튜디오 녹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게다가 그 활동은 거의 동시 진행형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유명한 마라톤 세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1971년에 4일에 걸쳐 <Birth>, <El Juicio>, <The Mourning Of A Star>, <Standing Outside> 등 넉 장의 앨범을 녹음했다. 그리고 1976년 11월에서는 10일 동안 일본의 다섯 개 주요 도시를 돌며 10장의 LP-CD로는 6장-로 이루어진 박스 세트 앨범 <Sun Bear Concerts>에 담기게 될 솔로 콘서트를 가졌다. 또한 1974년 4월에는 2주에 걸쳐 뉴욕에서의 리 코니츠, 쳇 베이커와 함께 한 퀸텟 앨범 녹음을 시작으로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유러피안 쿼텟의재즈 워크샵 녹음을 하고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유러피안 쿼텟의 첫 앨범 <Belonging>을 녹음한 뒤 다시 독일의 루드빅스부르크로 날아가 얀 가바렉과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협연한 앨범 <Luminescence>를 녹음하는 등 장소와 밴드 편성의 제약을 받지 않는 활동을 했다.
이처럼 그는 매 순간이 지나치면 안될 소중한 순간이라 생각한 듯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스튜디오에 들어가 단번에 녹음을 마쳤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서커스에 가까울 정도로 바쁘게 녹음한 앨범들 모두 뛰어난 완성도를 지녔다는 것이다. 정말 환상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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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에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키스 자렛의 활동은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는 마치 불노(不老)의 약을 먹기라도 한 듯 음악적 젊음을 유지했다. 하지만 50대에 들어선 1990년대 후반 그에게 만성피로증후군이 찾아왔다. 이 병은 특별한 이유 없이 임상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피로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병으로 일상 생활에 지장을 준다. 그 결과 그는 약 2년간 활동을 멈춰야 했다. 그러면서 그의 젊음은 막을 내린 것 같았다.
그러나 대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적절히 활용하는 지혜를 얻었다. 1998년 집에서 아내를 위해-하지만 지금은 이혼했다- 녹음한 솔로 앨범 <The Melody At Night With You>로 조심스레 재기한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활동을 이어갔다. 먼저 그는 즉흥 솔로 콘서트와 트리오로 활동 범위를 축소했다. 그리고 즉흥 솔로 콘서트는 이전처럼 장시간에 여러 음악적 요소들을 연결하는 대신 순간적 감흥을 짧게 나누어 표현하는 것으로 연주 방식을 바꿨다. 대신 오랜 시간에 걸쳐 상상력을 확장하는 연주는 혼자가 아니라 트리오 멤버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 범위의 축소와 연주 방식의 변화를 자신의 상황에 맞춘 어쩔 수 없는 순응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분명 그의 표현 방식은 한정되었지만 음악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90분 전체를 왕성한 체력으로 뛰어다니지 못했을 때도 경기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결정적인 단 한 번의 기회를 골로 연결시키곤 했던 안정환처럼 그의 판타지스타로서의 능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