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공연 같은 연주
보통 미셀 카밀로를 사람들은 라틴 재즈 피아노 연주자로 분류하곤 한다. 실제 그는 1983년 라틴 재즈의 중요인물 티토 푸엔테의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하여 라틴 색소폰 연주자 파키토 드리베라와 함께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또한 연주에 있어서도 라틴 리듬을 적극 활용하여 화려하디 화려한 솔로 연주를 즐기는 한편 타악기 연주자로 호라시오 에르난데스, 지오바니 히달고 등의 라틴 계열의 연주자를 기용하고 있으니 그를 라틴 재즈 연주자로 보는 것은 분명 타당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는 라틴 재즈 이전에 비밥의 어법에 누구보다도 충실한 피아노 연주자이다. 또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정도로 클래식 연주에도 정통한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를 단순히 라틴 재즈 연주자로만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라틴 재즈, 비밥, 클래식 등에서의 뛰어난 면모를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미셀 카밀로라는 피아노 연주자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그는 듀오, 트리오, 오케스트라 등 편성을 바꿔가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해 왔다. 하지만 전문 연주자로서 30년간 활동하면서 솔로 앨범은 지난 2005년에 발표했던 <Solo>가 유일하다. 그런데 첫 솔로 앨범에서 그는 서정성에 보다 집중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 시절에는 서정성의 표현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뛰어난 연주와는 별개로 앨범의 외양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첫 솔로 앨범 후 8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앨범은 그와는 다르다. 자작곡 7곡에 재즈 스탠더드 곡 3곡 그리고 라틴(쿠바) 곡 한 곡까지 총 11곡을 연주하면서 그는 증명 사진을 찍듯이 자신의 음악적 개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일종의 30년 음악 인생의 종합 정리라 할까?
먼저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타이틀 곡 ‘What’s Up’을 통해 그는 라틴 재즈 이전에 재즈 피아노 연주자로서 자신의 근원을 드러낸다. 그는 클래식을 한창 공부하던 14세 무렵에 라디오에서 아트 테이텀의 연주를 듣고 재즈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팻츠 왈러, 아트 테이텀 등으로 대표되던 스트라이드와 부기우기 피아노 시절을 향하고 있는 이 곡을 앨범의 첫 곡으로 배치한 것은 분명 의도적이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콜 포터의 스탠더드 곡‘Love For Sale’의 연주에서는 왼손과 오른손의 화려한 교차를 통해 멜로디컬한 리듬, 리드미컬한 멜로디를 들려주는 가운데 재즈 피아노 솔로 연주의 가장 전형적인 이미지를 충실히 재현한다. 이것은 데이브 브루벡 쿼텟의 명곡-폴 데스몬드 작곡의-을 연주한‘Take Five’에서도 지속된다. 그리고 또 다른 재즈 스탠더드 곡 ‘Alone Together’의 연주에서는 내성적이면서도 표현적인 재즈 발라드 연주의 정석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언급한 곡들이 비밥 성향의 정통 재즈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미셀 카밀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A Place In Time’,’ Sandra’s Serenade’, ‘At Dawn’은 클래시컬한 그의 모습을 그리게 하는 곡이다. 이들 곡에서 그는 리듬을 안으로 감추고 피아노의 영롱한 음색을 살려 하나의 풍경을 그리거나 이야기를 쓰듯이 연주하는데 그것이 빌 에반스, 키스 자렛 등의 서정주의를 연상시키면서 16세 때 도미니카 국립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고 뉴욕에서 줄리어드 음대에서 클래식을 공부했던 그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잔잔함 속에서 서서히 상승하는‘A Place In Time’은 클래식 야상곡을, 단순한 패턴을 기본으로 힘을 뺀 간결한 연주가 이어지는 ‘Sandra’s Serenade’는 인상주의 클래식 같은 느낌을 준다.
라틴 재즈 연주자로서의 미셀 카밀로의 모습은 ‘Island Beat’, ‘Paprika’, ‘On Fire’, ‘Chan Chan’ 등의 곡에 담겨 있다. 이들 곡에서 그는 범접하기 어려운 화려하고 빠른 연주로 곡들을 부풀리고 온도를 높인다. 그래서 피아노 솔로임에도 마치 오케스트라의 합주 같은 거대함으로 감상자를 압도한다. 1989년도 트리오 앨범의 타이틀 곡으로 등장한 이후 피아노 연주자의 대표곡의 하나로 자리 잡은 ‘On Fire’가 특히 그렇다. 이 곡에서 그는 리듬과 템포 그리고 강약을 꿈틀거리는 불꽃처럼 자유로이 조절하여 곡을 라틴 재즈를 넘어 환상곡의 차원으로 이끈다. 부에나 비스타 클럽의 멤버였던 콤빠이 세군도의 곡 ‘Chan Chan’에서는 원곡의 서정을 존중하면서도 리듬을 무겁게 가져가 색다른 질감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만약 이번 앨범이 미셀 카밀로라는 피아노 연주자의 음악 세계를 간편하게 조망하는데 그쳤다면 이 앨범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세 개의 자아가 한꺼번에 튀어나온 느낌이랄까? 하지만 미셀 카밀로는 자신을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연주를 잘 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듣기 좋게 펼쳐 놓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단순히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백화점 식으로 나열하기 보다는 섬세하게 섞고 이었다.
그렇다면 그 배열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나는‘공연처럼’ 배열의 기준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보통 독주회에서 연주자는 감상자의 집중도를 유지하기 위해 공연 전체에 리듬, 강약을 부여한다. 그래서 유사한 연주를 연이어 하는 대신 다른 분위기의 곡들을 병치하곤 한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연주의 온도를 높여 일종의 극적 절정 상태에서 공연이 끝나도록 설정한다.
미셀 카밀로의 이번 앨범은 전체 감상에 있어 바로 이러한 피아노 독주회처럼 다가온다. 흥겹고 정겹게 ‘What’s Up’으로 시작하더니 재즈의 자유와 클래식적 서정 사이를 오가더니 ‘Paprika’와 ‘Love For Sale’을 거치며 조금씩 온도를 높여 결국 ‘Chan Chan’과 ‘On Fire’로 폭발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차분하게 흐르는 ‘At Dawn’은 분위기를 정화하는 앙코르 곡 역할을 한다.
이런 생각이 가능한 것은 미셀 카밀로의 연주에도 그 이유가 있다. 분명 스튜디오에서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한 것이지만 그의 연주는 관객의 호응에 자극을 받아 건반을 누를 때나 가능한 뜨거운 활력으로 가득하다. 특히 리듬을 연주하는 왼손은 피아노를 부수려는 듯 건반을 때리고 또 때린다. 그래서 피아노 음색은 동그랗다기 보다 무엇에 눌린 타원형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앨범을 들으며 멀리는 프란츠 리스트가 제시했다는 클래식 피아노 리사이틀부터 가까이는 재즈를 중심으로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즉흥적으로 혼용하여 관객을 경탄하게 했던 키스 자렛의 솔로 콘서트, 약한 체형과 달리 넘치는 힘으로 연주했던 미셀 페트루치아니의 솔로 콘서트를 떠올렸다.
이런 이유로 이 앨범은 곡 단위로 파일을 다운로드 해서 듣는 것을 거부한다. 이 앨범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일체의 곡 건너뜀 없이 전체를 온전히 한다. 그래야 자신의 세계에 감상자를 초대하여 잘 준비된 공연을 보는 것 같은 황홀경으로 이끄는 미셀 카밀로를 만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선택은 무척이나 현명했다. 그러면 이제 자세를 바로 하고 공연장을 상상하며 앨범을 들어보자. 내 추천사는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