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앨범의 주인공 카렌 목은 아마도 한국인들에게는 막문위(莫文蔚)란 배우로 더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실제 그녀는 <서유기>(1994)를 비롯하여 <타락천사>(1995), <색정남녀>(1996), <식신>(1996), <희극지왕>(1999) 등의 영화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나 또한 이들 영화를 통해 그녀를 알았다.
그렇기에 그녀가 노래를 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 같다. 물론 그녀를 아는 사람들의 다수는 그녀가 가수로서 꾸준히 앨범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홍콩 영화 배우들이 연기를 중심으로 노래를 병행하는 것처럼 그녀 또한 배우로서의 인기를 배경으로 노래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영화 이전에 가수로서의 삶을 먼저 시작했다. 이탈리아를 거쳐 런던 대학에서 이탈리아 문학을 공부하던 중 여명의 앨범 등을 제작한 제작자 뇌송덕을 만나 1993년 첫 앨범을 발표하면서 연예계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가수로서의 카렌 목은 배우로서의 카렌 목 이상의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특히 대만에서 인기가 좋아 홍콩 가수로서는 최초로 대만의 그래미라 할 수 있는 골든 멜로디 어워드 최우수 여성 가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것도 두 차례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녀의 노래들은 국내에서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을까? 90년대 있었던 홍콩 가수들의 인기-영화와는 별개로-가 오래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노래들이 중국어로 되어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국적인 취향을 선호하는 월드뮤직 애호가들에게도 중국어로 된 노래는 그리 친숙하지 않다.
따라서 카렌 목의 이번 앨범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가수로서의 그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예상된다. 처음으로 영어로 노래한 곡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중화권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것에서 나아가 이제는 보다 폭 넓은 감상자층을 확보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이 앨범을 채우고 있는 거의 모든 곡들이 새 앨범을 위해 중국인 작곡가들이 쓴 새로운 곡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영미 히트 팝 곡들임을 생각해야 한다.
한편 이 앨범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영어로 노래하는 것보다 더 큰 음악적 모험을 시도했다. 그것은 바로 재즈다. 이전까지 그녀는 주로 팝 성향의 음악을 선보였었다. 하지만 이번 앨범에서는 재즈를 배경으로 노래한다! 실제 앨범에서 그녀가 노래한 곡들을 살펴보면‘Love For Sale’, ‘My Funny Valentine’, ‘Stormy Weather’, ‘A Fine Romance’, ‘The Man I Love’, ‘I Can’t Give You Anything But Love’ 등 스탠더드 재즈곡들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 참으로 의외라 할 수 있는데 사정을 살펴보니 이탈리아, 영국 등에서 공부할 무렵부터 재즈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것을 이번에 과감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재즈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음악은 아니다. 그녀가 빌리 할리데이나 엘라 핏제랄드 같은 재즈의 디바들을 좋아했다는 것과 그녀들처럼 노래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녀 또한 이를 정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그녀의 음악적 본령이 어디까지나 팝에 있음을 또한 잊지 않았다. 그 결과 과거를 부정하는 듯한 흑인적인 색채가 강한 복고적인 재즈가 아니라 팝적인 감각이 적절히 배려된 편안하고 도시적인 소프트 재즈가 만들어졌다.
실제 앨범에서 그녀는 ‘Stormy Weather’같은 곡에서 재즈 보컬 특유의 떨림(바이브레이션)을 사용하고 ‘The Man I Love’같은 곡에서 백인 여성 재즈 보컬을 연상시키는 고혹적 관능미를 발산하지만 과하게 재즈 보컬의 옷을 입으려 했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재즈 안에서 자신이 가장 자연스러울 수 있는 부분을 찾아 그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않았다고 할까? 이 절제가 그녀의 노래를 담백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아주 평이하고 안정적인 길만을 선택했다는 것은 아니다. 듣기에 편안하고 부담 없는, 재즈의 낭만적 매력이 잘 배어 있는 앨범이긴 하지만 곳곳에서 뜻 밖의 신선한 시도들이 발견된다. 스탠더드 재즈 곡들 외에 비틀즈의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크리스 아이삭의 ‘Wicked Game’, 스팅의 ‘Moon Over Bourbon Street’그리고 포티 쉐드의 ‘Sour Time’같은 곡을 노래한 것이 좋은 예이다. 분명 카렌 목은 평소 재즈와 함께 이들 곡들 또한 즐겨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영어 앨범에 이들 곡들을 포함시켰을 것이다. 그래도 포티 쉐드의 트립 합을 재즈로 바꾸어 노래한 것은 전문 재즈 연주자들도 쉽게 생각하지 못할 생경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기대 이상으로 잘 바꾸었다. 또한 몽환적인 색채의‘Wicked Game’이나 사다오 와타나베의 색소폰 솔로를 들을 수 있는 ‘Moon Over Bourbon Street’도 각각 원곡의 분위기를 반영하면서도 재즈적인 맛을 보다 적극 느끼게 해준다.
앨범을 자연스레 관통하는 동양적인 분위기도 앨범을 색다르게 바라보게 한다. 중국 전통 악기인 얼후-우리의 해금과 유사한 악기-와 비파-기타처럼 현을 뜯어 연주하는 악기-가 등장하는 ‘Love For Sale’이 그렇다. 곡의 재즈적인 맛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레 동양적인 정취를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While My Guitar Gently Weeps’에서는 카렌 목 본인이 연주한 구쟁-우리의 가야금과 유사한 악기- 연주가 등장한다. 원곡에 특별히 참여했던 에릭 클랩튼의 기타 솔로를 대신해 연주한 것인데 동양적인 정서로 환기된 신비함이 인상적이다. 그녀의 구쟁 연주는 ‘Stormy Weather’에서도 만날 수 있다. 역시 재즈의 외연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안에 은근한 동양적 색채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나아가 이러한 동양적 색채는 앨범에 삽입된 중국 곡 두 곡 ‘The Face That Launched a Thousand Ships’와 ‘Shanghai Nights’의 등장을 어색하지 않게 한다. 그리고 나아가 앨범을 재즈를 좋아하는 어느 팝 가수의 재즈적 시도가 아니라 재즈를 매개로 한 홍콩 출신 팝 가수의 자기 표현으로 생각하게 한다.
한편 앨범에 참여한 연주자를 잠시 언급해야겠다. 아마도 재즈 애호가들 중 상당수는 우리의 베이스 연주자 최은창과 노르웨이 출신의 건반 연주자 부게 베셀토프트가 참여했다는 것에 흥미를 느껴 이 앨범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수록곡의 편곡부터 전체 제작을 담당한 부게 베셀토프트의 참여는 앨범의 색다른 완성도를 높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팝적인 색채가 강한 일렉트로 재즈부터 북 유럽의 민속적 전통이 잘 반영된 서정적 재즈를 아우르는 폭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이 앨범이 편안한 소프트 재즈를 추구하면서도 결코 경박한 느낌을 주지 않는 것, 재즈의 질감 속에 동양적 색채를 지니게 된 것도 이러한 그의 음악적 포용력이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글쎄, 앞으로 카렌 목이 영어로 노래를 계속할 지, 재즈를 노래할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앨범이 앳된 외모와 상관 없이 중년의 시기에 접어든 그녀의 (음악) 인생에서 인상적인 순간의 기록으로 자리잡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녀의 재즈적 삶이 조금 더 지속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