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약자들에 대한 공감을 담은 자유로운 연주
어디일까? 재개발을 앞둔 변두리 주택단지인 듯하다. 멀리 아파트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재개발 예정지라 생각된다. 판자쪼가리, 죽어 있는 풀이 담긴 스티로폼 박스 등의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한 때 이 곳은 흰 빨래가 미풍에 조용히 흔들리고, 아이들이 뛰어 놀며, 벽 아래에는 이런 저런 꽃들이 소박하게 피어 있는 훈훈하고 정겨운 풍경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떠나고 없다. 조용히 소멸을 기다릴 뿐이다. 그 풍경에서 알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이 느껴진다.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떠난 것일까? 혹시 새로운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사람이 한 명 보인다. 슬리퍼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청년이 이 황량한 공간에서 순박한 웃음을 짓고 있다. 시간의 흐름을 비켜간 듯한 이 남루한 공간이 편한 듯 그는 땅에 눕기도 한다. 어찌 보면 나사가 풀린 사람이 아닐까 싶어 보이는 저 청년이 바로 우리가 듣고 있는 이 앨범의 주인공 김오키다.
색소폰 연주자 김오키의 첫 앨범은 바로 저 풍경에서 시작한다. 사실 그는 저 낡은 공간에서 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설정된 사진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 저 곳에서 살았다. 그러니까 쓸쓸한 풍경에 가려진 뛰어 놀던 아이들 가운데에는 그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련한 추억 속에 다시 찾은 그곳은 재개발 계획으로 저렇게 버려진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이 버려진 풍경에서 그는 소설 하나를 생각했다. 바로 1978년에 출간되어 이듬해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조세희의 연작 소설집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다. 김오키는 이 소설집에서 곡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이것은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앨범의 가운데에 위치한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외에 그 앞에 배치된 ‘칼날’또한 소설집에 실린 단편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또한 두 번째 곡 ‘꼽추’는 소설집의 첫 소설‘뫼비우스의 띠’에 등장하는 철거민 꼽추에서 가져온 것이며, ‘영희마음 옥희마음’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등장하는 영희의 마지막 대사 ‘아버지를 난장이라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에 대한 김오키(옥희)의 공감을 반영한 것이다.
소설집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 도시 빈민층의 삶과 그 안에 담긴 절망을 담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도시 빈민은 난쟁이로 묘사된다. 경제적 소외를 넘어 운명적으로 소외된 존재. 그래서 소설집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그 안의 답답하고 비참한 난쟁이 빈민층 가족의 삶에 안타까워하고 나아가 소외를 강요하는 듯한 그들 앞에 놓인 현실에 분노하게 된다.
김오키 또한 소설집을 읽으며 같은 감정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앨범에 담긴 곡들은 비감과 분노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김성배의 묵직한 베이스와 김오키의 색소폰이 숨막히는 긴장을 유지하다가 급기야 밴드 전체가 폭발해 버리는 첫 곡‘너와 나의 음모론’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꼽추’는 슬픔을 참다 못해 흐느끼는 듯한 김성배의 베이스 솔로가 우리의 전통적인 ‘한(恨)’,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운명적 슬픔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뜨거운 온도로 지속되는 리듬 위로 색소폰이 포효하는 ‘칼날’에 이르러 분노로 폭발한다.
슬픔과 답답함이 급기야 폭발에 이르는 서사적 흐름은‘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영희마음 옥희마음’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비감 가득한 긴장 속에서 서서히 불협의 상태로 상승한 후 다시 비감의 상태로 돌아왔다가 다시 ‘영희마음 옥희마음’에서 분노 가득한 상태로 상승하는 흐름은 원작 소설에서 재개발을 앞두고 소외 당하는 난쟁이 가족-난쟁이 아빠, 엄마, 영수, 영호, 영희로 구성된-의 비극적 이야기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세상을 저주하는 영희의 마음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소설을 읽어가며 사운드트랙처럼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편 파도소리로 시작해 베이스 위로 특별 게스트인 아야 이세키의 노래까지 등장하며 평화롭고 전원적인 풍경, 김오키가 틈날 때마다 여행한다는 오키나와의 클럽과 그 주변이 아닐까 싶은 풍경을 그린 듯한 ‘오리온 스타 하우스’는 소설에서 받은 분노를 치유하는 의미로 만든 곡이다. 다른 곡들이 난쟁이 가족의 응어리를 분노 어린 연주로 풀려 했다면 이 곡은 오키나와에서 그가 느꼈던 행복을 난쟁이 가족과 공유하고픈 김오키의 바람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일 뿐 그는 다시 ‘독립하지 못한 해방에 의한 자유’에서의 부서질 듯 어지러운 즉흥 연주를 통해 70년대 난쟁이 가족의 현실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고 말하며 앨범을 마친다.
이 앨범에 담긴 음악은 프리 재즈 혹은 아방가르드 재즈라 할 수 있다. 재즈 애호가라 하더라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스타일의 음악. 특히나 집중해서 음악을 감상할 여유가 부족한 요즈음 같은 때에는 더욱 더 난해하게 비춰질 수 없는 음악이다. 그래서일까? 애초에 김오키는 이 앨범을 정식 발매하지 않으려 했다. 재즈 내에서 자신의 음악이 변두리에 배치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 재즈의 현실에서 김오키 같은 연주자와 그의 자유로운 음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국 재즈는 양적인 성장을 거쳐 질적인 비약의 단계로 이행했다. 굳이‘한국’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두지 않아도 될, 우수한 연주자와 앨범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질적 다양성이다. 김오키의 이번 앨범은 이러한 한국 재즈의 질적 다양성의 폭을 넓히는 역할을 한다.
물론 김오키 이전에도 한국에 프리 재즈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강태환이나 박재천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근 프리 재즈를 표방한 앨범들이 여러 장 발매되었다. 그런데 이들 앨범은 즉흥에 집중하면서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으로서의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그 프리 재즈는 질감의 차이, 비정형의 변화가 매력이었다. 그런데 김오키의 프리 재즈는 이에 비해 구조적인 틀이 상당히 견고하다. 프리 재즈이면서도 재즈를 재즈이게 만드는 전통적인 요소들에 대한 존중이 엿보인다. 존 콜트레인, 조 헨더슨을 시발점으로 파로아 샌더스, 아치 쉡, 알버트 아일러에 이르는 프리 재즈 색소폰 연주자들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게다가 당시 프리 재즈 연주자들이 현실참여적 성격이 강했음을 생각하면 70년대 빈민층의 삶에 대한 연민으로 시작되어 지속중인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 김오키의 음악 또한 이들 선배 연주자들의 작업 방식에서 영감을 받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 소설에 바탕을 둔 서사성을 지니고 있기에 소리 자체는 낯설지 몰라도 연주의 흐름을 따라가기 쉽다는 것도 매력이다. 실제 김오키는 대중이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쉬운 프리 재즈를 만들려 했다고 한다. 자유롭지만 그 안에서 지켜야 하는 규율은 존중하는 음악, 그러면서 소외된 자들의 응어리를 풀어줄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앨범은 100% 성공작이라 확신한다.
한편 김오키라는 색소폰 연주자의 이력 또한 앨범의 주제와 그 음악만큼이나 주변인 적이다. 사실 재즈 애호가라 하더라도 상당수는 이 색소폰 연주자를 이번 앨범을 통해 처음 알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해외 유학을 마치고 이번에 귀국한 신예가 아닐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순수하게 국내에서 성장한 연주자이다. 그것도 독학에 가까운 방식으로 자신의 소리를 찾아낸 연주자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악기를 배우기에는 다소 늦은 감이 있는 25세였던 때에 존 콜트레인의 연주를 듣고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받은 색소폰 교육은 학원을 2개월 수강한 것이 전부. 이후 그는 혼자서 색소폰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강태환, 박재천 등의 조언을 통해 현재의 스타일을 확립했다고 한다. 연주 경험도 자주 여행한 오키나와에서 먼저 쌓았다. (참고로 김오키라는 이름은 오키나와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의 색소폰에서 날 것의 거침,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확실히 김오키는 학교를 통해 만들어진 연주자가 지배하는 현재의 재즈 환경에서 나오기 힘든 연주자이다. 그것도 뛰어난 실력을 지닌. 나는 한국 재즈가 보다 질적으로 우수하고 안정적인 환경을 지니기 위해서는 김오키 같은 연주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음악적 특성상 폭 넓은 호응을 얻지 못하겠지만 분명 그와 그 음악은 한국 재즈를 더욱 두텁게 하는데 일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