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오스트리아의 브레겐즈와 독일의 뮌헨에서 <Concerts> 앨범에 수록될 솔로 콘서트 녹음을 한 이후 키스 자렛은 1년 반 동안 앨범을 녹음하지 않았다. 다른 콘서트 녹음이 있었는데 앨범으로 발매가 되지 않은 것인지 정말 아무런 활동이 없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쨌건 당시 1주일에 서너 장 분량의 앨범을 녹음하던 그였기에 1년 이상 앨범을 발매하지 않은 것은 무척이나 의외였다.
어쩌면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1983년 1월 공백을 깨고 뉴욕의 파워스테이션 스튜디오에 들어가기로 했을 때 찰리 헤이든, 폴 모시앙과의 트리오 활동 이후 10여 년간 하지 않았던 트리오 편성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트리오를 위해 그가 부른 연주자는 게리 피콕과 잭 드조넷. 1977년 게리 피콕의 이름으로 앨범 <Tales Of Another>를 녹음하면서 호흡을 맞추었던 멤버들이었다.
정작 스튜디오에 모였지만 무엇을 녹음할 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스탠더드 곡들을 연주하자는 약속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세 연주자는 현장에서 11곡의 스탠더드 곡을 골라 연주했다. 그런데 그 호흡이 너무나 좋았다.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는 연주의 즐거움이 대단했다. 그래서 스탠더드 곡 외에 즉흥성을 살린 자유 창작곡 세 곡을 더 녹음했다.
이 날의 녹음은 석 장의 앨범으로 나뉘어 순차적으로 발매되었다. 그 가운데 스탠더드 곡을 녹음한 <Standard Vol.1>과 <Standard Vol.2>에 대한 이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 결과 한 번의 녹음을 위해 모였던 세 연주자는 이후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함께 하고 있다. 이것은 재즈사를 보면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매번 새로움을 요구하는 재즈의 특성상 연주자들의 이합집산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설령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이나 존 콜트레인 쿼텟처럼 정규 밴드의 형태로 비교적 장기간 지속되는 경우도 있지만 30년 이상 지속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 전에 각 멤버들이 유사한 연주에 싫증을 느끼거나 새로움의 한계를 느끼고 헤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연주자들의 즉흥적인 만남이 주는 신선함은 분명 매력적이고 이를 통해 재즈의 역사가 진행될 수 있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순간성을 극대화될 수 있더라도 발전과 깊이의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때로는 지속되는 밴드도 필요하다. 실제 명반의 상당수는 같은 멤버들이 오랜 시간 함께 하여 만들어 낸 것들이다. 키스 자렛 트리오의 경우도 시작부터 완벽한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이상적이 되어간다. 2000년대에 녹음한 <Inside Out>, <Always Let Me Go>, <Out-Of-Towners>같은 앨범들이 이를 증명한다. 이들 앨범은 분명 트리오의 20년 역사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연주를 담고 있다.
이 트리오가 인기를 얻게 된 데에는 물론 익숙한 스탠더드 곡들을 전통적인 트리오 편성으로 연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다수의 감상자들은 익숙함을 기본으로 새로움을 요구하니 말이다. 게다가 테마에서 출발해 아름답고 투명한 멜로디를 이어나가는 키스 자렛의 솔로는 재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일 지라도 단번에 매혹될만한 하다.
한편 음악적으로 본다면 이 트리오는 빌 에반스가 혁명적으로 제시했던 트리오의 양식을 가장 훌륭하게 계승, 확장한 연주를 펼친다는 점에서 음악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 하다. 빌 에반스가 제시했던 트리오 연주 방식은 피아노가 중심이면서도 베이스와 드럼이 반주자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동시적으로 자유로운 솔로를 펼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솔로는 매 순간 다른 연주자를 경청하고 이에 반응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자유로우면서도 조화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인 트리오의 모습을 키스 자렛 트리오는 현실에서 보여준다.
어쩌면 스탠더드 곡들을 연주한다는 것은 갈수록 연주자들이 자신에 최적화된 창작곡을 연주하는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보수적인 것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키스 자렛 트리오의 스탠더드 연주는 절대 시대착오적이거나 고루하지 않다. 이들의 연주는 트리오의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늘 현대적인 감각을 유지한다. 따라서 트리오의 스탠더드 곡 연주는 이미 존재했던 연주의 반복이 아니라 과거의 새로운 현재화라 할 수 있다. 과거 오스카 피터슨이 50년대에 의도적으로 스탠더드 곡들을 그 시대의 감성을 반영하여 정리했다면 키스 자렛을 중심으로 한 세 연주자는 이를 다시 쇄신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 키스 자렛은 (의도적인 거부인지는 모르지만) 세간의 평가와 달리 빌 에반스보다는 오스카 피터슨의 기교와 아마드 자말의 감성과 상상력을 중심으로 한 연주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다. 특히 그 와 게리 피콕, 잭 드조넷 모두 트리오 연주를 시작했을 때 아마드 자말의 앨범 <Poinciana>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한다.
키스 자렛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트리오의 연주가 아방가르드한 연주를 펼친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고 한다. 실제 트리오의 연주는 종종 비밥을 넘어 진보적인 색채를 띠곤 한다. 그럼에도 그 연주가 무조건 난해하지 않게 비추어지는 것은 다른 어느 트리오보다도 자유롭고 안정적인 세 연주자의 호흡 때문이다.
지금까지 키스 자렛 트리오는 총 19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잭 드조넷 대신 폴 모시앙이 함께 했던 1999년도 녹음 <At the Deer Head Inn>까지 포함하면 20장이 된다.) 그런데 석장으로 발매되었던 1983년의 뉴욕 녹음을 제외하고는 모두 라이브 녹음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이 역시 서로 다른 곳을 볼 지라도 다른 멤버가 무엇을 원하는지 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트리오의 호흡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실제 이들의 라이브 녹음을 들어보면 박수 소리가 없다면 스튜디오에서 사전 편곡과 여러 차례의 연주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하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무한한 상상력으로 테마를 새로운 차원으로 비상하게 하고 그 안에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연주지만 세 사람의 연주는 결코 과장되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화려한 연주이면서도 결코 음 하나를 허투루 사용하는 법이 없다.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최선의 음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트리오의 연주는 매번 단 그 곡에 대한 가장 이상적이고 유일한 정답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한편 트리오의 생동감이 최상으로 발현된 라이브 앨범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그 연주를 실제 눈 앞에서 보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한다. 사진 속 아름다운 여인을 직접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이보다는 덜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2010년까지 트리오는 한국을 찾지 않았다. 옆 나라 일본에는 정기적으로 방문함에도 말이다. 키스 자렛이 나이가 들수록 다니던 장소에서만 공연을 펼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장소가 주는 익숙함이 라이브 임에도 스튜디오 같은 완벽한 연주를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 그래서 한국은 트리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며 체념하던 차에 갑작스레 결정되었던 2010년의 첫 내한 공연은 무척이나 반갑고 놀라운 것이었다. 물론 연주 또한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꿈이 실현된 듯한 기쁨에 빠져 정작 트리오의 연주를 제대로 듣지 못한 듯한 느낌도 있었다.
만약 당신 또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이번 5월 17일로 예정된 공연을 다시 보기 바란다. 특히나 이번 공연은 세 연주자의 나이를 생각하면 매우 소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키스 자렛은 올해 우리 나이로 69세가 되었고 잭 드조넷은 72이 되었으며 게리 피콕은 79이 되었다. 그 가운데 게리 피콕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매번 현재 진행형의 연주를 들려주었기에 세 연주자가 그토록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 시간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듯이 트리오의 유효 기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트리오의 이번 내한 공연은 이상적인 트리오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두 번째가 아니라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 이후 세 연주자가 계속 건강을 유지하여 다시 우리를 찾는다면 더욱 좋겠지만 말이다.
Keith Jarrett Trio & Standards
보통 키스 자렛 트리오를 스탠더드 트리오라고 부르곤 하는데 이것은 키스 자렛, 잭 드조넷, 게리 피콕의 호흡이 트리오 연주의 모범 혹은 기준(Standard)으로 삼을 정도로 이상적임을 가리키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범의 모습을 익숙하다 못해 진부할 수도 있는 스탠더드 곡들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이 트리오가 어떤 스탠더드 곡들을 연주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이를 위해 잭 드조넷 대신 폴 모시앙이 함께 했던 <At The Dear Head In>을 제외하고 이번 새 앨범까지 포함하여 오로지 스탠더드 트리오가 연주한 총 22개의 앨범-DVD 두 장을 포함하고 6장 박스 세트로 발매된 <At The Blue Note>는 한 장으로 계산-에 수록된 곡들을 일일이 살펴보았다.
먼저 트리오가 연주한 곡은 총 157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두 번 이상 연주한 곡은 44곡에 지나지 않았다. 전체 연주곡 가운데 28% 정도이다. 7곡에 두 곡 정도가 이전 앨범에서 연주되었던 곡인 셈이다. 게다가 세 번 이상 연주한 곡은 15곡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레퍼토리가 한정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다. 그럼에도 레퍼토리의 반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애초에 스탠더드 곡 자체에 익숙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같은 곡을 종종 연주하는 것은 그리 불평할 일은 아니다. 같은 곡의 다른 연주를 통해 트리오의 창의성을 보다 쉽게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트리오는 어떤 곡을 제일 많이 연주했을까? 다름 아닌 ‘When I Fall In Love’였다. 트리오는 이 곡의 연주를 1986년도 독일 뮌헨 공연을 담은 앨범 <Still Live>를 시작으로 총 다섯 장의 앨범에 수록했다. 앨범 <Still Live>는 트리오의 최고 앨범의 하나로 여기에 수록된 ‘When I Fall In Love’는 키스 자렛의 낭만성이 십분 발현된 곡이다. 그래서일까? 이 앨범 이후에 발매된 다른 라이브 앨범들에서는 앙코르 곡으로 등장한다. 아마 많은 관객들이 <Still Live>앨범에서의 감동을 기억하고 이 곡을 연주해달라고 하는 지도 모르겠다.
다름으로 트리오가 자주 연주한 곡은 ‘Autumn Leaves’였다. 총 4장의 라이브 앨범에 수록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가운데 두 장은 <Still Live>와 <At The Blue Note>로 ‘When I Fall In Love’를 수록한 앨범들이다. 이 두 앨범 모두 트리오의 명반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앨범들을 감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레퍼토리가 중복된다는 느낌을 받았을 지도 모르겠다.
이들 두 곡에 이어 세 번씩 연주된 곡은 총 13곡으로‘All Of You’, ‘All The Things You Are’, ‘I Fall In Love Too Easily ‘, ‘If I Were A Bell’, ‘My Funny Valentine’, ‘On Green Dolphin Street’, ‘Smoke Gets In Your Eyes’, ‘Stella By Starlight’, ‘Things Ain’t What They Used To Be’ 등 스탠더드 곡 가운데 스탠더드 곡이라 할 수 있는 9곡과 올리버 넬슨(Butch And Butch), 소니 롤린스(Oleo), 마일스 데이비스(Solar), 텔로니어스 몽크(Straight, No Chaser) 등 선배 연주자들이 만든 곡 4곡이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곡들과 조금은 더 연주적 측면을 강조할 수 있는 곡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세 번 이상 연주한 15곡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앨범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At The Blue Note>앨범으로 8곡을 수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앨범이 6장으로 이루어진 박스 세트이고 그만큼 수록곡이 많음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그 다음은 각각 5곡을 담고 있는 두 장의 공연 실황 DVD <Standards I/II (Tokyo 1985/1986)>과 <Live In Japan93/96>가 차지했다. 모두 일본 공연을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스탠더드를 좋아하는 일본 감상자들의 취향을 맞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키스 자렛 개인이건 트리오건 미국 다음으로 일본, 특히 도쿄 공연이 제일 많았음을 생각하면 일본 감상자들이 키스 자렛 트리오의 레퍼토리에 일정부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 다음으로는 <Tribute>와 <Up For It>이 4곡을, <Still Live>와 <My Foolish Heart>가 3곡을 담고 있다. 모두 박스 세트도 DVD도 아니므로 가장 손쉽게 트리오가 즐겨 연주하는 곡들을 접할 수 있는 앨범이 아닌가 싶다. 실제 이 넉 장의 앨범을 모두 감상하면 트리오의 애주곡(愛奏曲) 15곡 가운데 12곡을 듣게 된다. 모두 트리오의 명연을 담고 있는 앨범들이니 (다시) 한번 감상해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이번 서울 공연은 어떨까? 어떤 곡이 연주될 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2010년 공연에서 총 12곡 가운데 4곡의 애주곡(愛奏曲), ‘All Of You’, ‘Things Ain’t What They Used To Be’, ‘I Fall In Love Too Easily’, ‘When I Fall In Love’를 연주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 공연에서도 이들 곡 가운데서 몇 곡은 연주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몇 곡은 연주하지 않을까?
01. When I Fall In Love 5
02. Autumn Leaves 4
03. All Of You 3
04. All The Things You Are 3
05. Butch And Butch 3
06. I Fall In Love Too Easily 3
07. If I Were A Bell 3
08. My Funny Valentine / Song 3
09. Oleo 3
10. On Green Dolphin Street 3
11. Smoke Gets In Your Eyes 3
12. Solar 3
13. Stella By Starlight 3
14. Straight, No Chaser 3
15. Things Ain’t What They Used To Be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