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피터슨 (Oscar Peterson : 1925.08.15 – 2007.12.23)

op

스윙의 의지로 충만했던 피아노 연주자

한국에서 재즈를 막 듣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재즈 좀 들었다는 사람들이 듣기 쉽다며 추천하는 앨범 중에는 오스카 피터슨의 <We Get Requests>(Verve 1964)가 있다. 이미 재즈 연주자로 활동한지 20년이 넘은 오스카 피터슨이 평소 공연 등에서 자주 신청을 받았던 곡들을 모아 연주한 앨범이다. 그만큼 대중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또 재즈의 맛을 편하게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되는 것이리라.

나 또한 재즈에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 여기저기서 좋다고 하길래 이 앨범을 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이 앨범에서 그리 좋은 느낌을 받지 못했다. 빠른 리듬을 기반으로 되는대로 연주해서 좀처럼 테마를 발견하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변화를 거듭하는지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냥 내 귀에는 어느 수다스러운 아저씨의 일장 연설로 들렸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재즈 피아노 트리오 앨범을 잘 듣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멜로디를 따라갈 수 있는 색소폰이나 트럼펫 중심의 연주를 들었다.

내가 이 앨범에 담긴 오스카 피터슨의 연주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멜로디가 선명한 낭만적인 발라드 계열의 연주를 기대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무엇보다 내가 아직 재즈를 익숙하게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재즈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난 후 이 앨범을 다시 들었을 때 나는 그 수다스러운 연주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래서 나 또한 지금은 재즈를 처음 들을 때 오스카 피터슨의 연주를 들어보기를 권하고 있다.

재즈 애호가들은 오스카 피터슨의 연주를 편하다, 낭만적이다라고 하며 즐기겠지만 사실 재즈가 낯선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음들의 향연에 나처럼 어지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오스카 피터슨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연주가 재즈의 가장 기본적인 면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테디 윌슨, 냇 킹 콜, 아트 테이텀 등 비밥은 물론 스윙 시대 이전의 선배 연주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아트 테이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로드 러너(Road Runner)처럼 빠른 속주가 그렇다. 그는 침묵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듯 주어진 공간을 무수히 많은 음들로 채우기를 즐겼다. 그런데 그의 연주가 경이로웠던 것은 그토록 빠른 연주 중에도 스윙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는 왼손의 리듬 연주뿐만 아니라 오른 손의 멜로디 연주에서도 스윙했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 풍경도 보고 동승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운 여행에 비유할 수 있을까? 들뜬 마음의 여행자가 자유로이 부르는 콧노래 같은 즐거움이 그의 연주에는 늘 느껴졌다. 그를 두고 ‘건반의 제왕’(듀크 엘링턴), ‘스윙의 의지(The Will To Swing)’(로저 켈러웨이)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인 그가 재즈의 본고장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1940년대 후반에 있었던 제작자 노먼 그란츠와의 만남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그는 뛰어난 기교와 스윙감각으로 캐나다에서는 적지 않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래서 라디오 전파를 종종 타곤 했는데 이를 노먼 그란츠가 듣게 되었던 것이다. 라디오 연주에 매료된 노먼 그란츠는 오스카 피터슨이 출연하는 클럽을 직접 찾아가 단번에 이 피아노 연주자를 자신이 이끌고 있던 JATP(Jazz At The Philharmonic)에 합류시켰다. 알려졌다시피 JATP는 당대를 대표하는 재즈 연주자들로 구성된 밴드로 미국은 물론 유럽까지 순회하며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특별 초대 손님으로 합류했지만 오스카 피터슨은 이내 정규멤버가 되어 1950년대 공연을 함께 했다. 여기에는 그가 기대 이상으로 다른 연주자들-로이 엘드리지, 벤 웹스터, 밀트 잭슨, 클락 테리, 스탄 겟츠, 레스터 영 등-의 연주를 잘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엘라 핏제랄드의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했던 것도 이런 그의 능력 때문이었다. 사이드맨으로서 빛났던 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1950년대 Verve 레이블에서 녹음된 앨범들을 들어보면 된다. 아무 앨범이나 선택해 피아노 연주자를 확인해 보면 오스카 피터슨의 이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JATP 활동을 하면서 그는 베이스 연주자 레이 브라운과 듀오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타 연주자 바니 케셀을 합류시켜 피아노-베이스-기타로 구성된 트리오, 그러니까 그가 좋아했던 냇 킹 콜이 제시했던 편성의 트리오로 확장했다. 이 트리오는 이후 조 패스(기타) NHOP(베이스) 등으로 멤버 변화를 겪긴 했지만 당대를 대표하는 트리오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에드 티그펜, 바비 더햄, 루이 헤이즈 등의 드럼 연주자를 더해 쿼텟으로도 큰 인기를 얻었다. (물론 기타 없는 트리오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스윙에 기반을 두고 빠른 속주를 즐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기교를 전면에 내세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기예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음들을 순식간에 쏟아 내는 그의 연주는 분명 그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그만큼이나 뛰어난 멜로디 감각이 있었다. 그의 속주가 인기를 얻었던 것도 스윙과 함께 논리 정연하면서도 낭만적인 멜로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것은 그의 압도적인 속주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멜로디적 감각은 상대적으로 그의 후기 연주에서 쉽게 느껴진다. 그는 어릴 적부터 관절염을 앓았다. 게다가 100킬로그램이 넘는 체중은 그의 거동을 불편하게 했다. 그런 중 1993년 뇌졸증으로 몸의 왼쪽 부분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리듬 연주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는 2년여의 노력 끝에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기능이 약화된 왼손을 대신해서 오른 손 연주가 한결 강화된 연주였다. 그래서 단선율의 멜로디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누구는 이런 후기 연주가 인간승리의 증거가 될 수는 있지만 오스카 피터슨 특유의 매력을 느끼게 하기엔 부족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비록 한 손의 연주였지만 경쾌하게 노래하듯 멜로디를 이어가는 그의 스윙 감각은 그대로였다. 신체 조건의 변화는 그의 연주 방식에 영향을 끼쳤지만 그의 음악에는 결코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이 시점에서 본다면 오스카 피터슨의 연주 스타일은 다소 고전적인 맛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젊은 연주자들도 그리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를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그의 연주가 지닌 스탠더드적인 면 때문이다. 참고서나 문제집을 보느라 정작 소홀하게 되는 교과서 같은 것이랄까? 실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재즈 트리오의 새로운 연주를 받아들이면서 길을 잃었다 생각될 때 오스카 피터슨의 연주를 듣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출발점을 기억하고 방향감각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아 재즈란 이런 것이었지. 하면서 말이다. 

대표 앨범

Oscar Peterson Plays the Jerome Kern Songbook (Verve 1959)

1950년대의 오스카 피터슨은 스탄 겟츠, 엘라 핏제랄드, 벤 웹스터, 레스터 영 등 당대를 대표하는 여러 연주자의 세션을 담당하는 한편 트리오의 리더로서 다양한 앨범들을 녹음했다. 그런데 이 무렵 그의 트리오 앨범들은 마치 스탠더드 재즈곡을 정리하려는 듯 작곡가를 주제로 한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듀크 엘링턴, 리차드 로저스, 거쉰 등의 곡을 연주한 앨범들이 만들어졌다. 이 앨범도 제롬 컨을 주제로 ‘Song Is You’, ‘The Way You Look Tonight’, ‘Yesterdays’등의 곡들을 연주했다. 이들 곡들을 그는 솔로를 과하게 확장하는 대신 소품처럼 간결하게 연주하는데 주력했다. 또한 경쾌한 스윙감을 바탕으로 아기자기한 트리오의 어울림에 집중하면서도 낭만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We Get Requests (Verve 1964)

오스카 피터슨의 많은 앨범 가운데서 석 장을 선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이 앨범이 늘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이 앨범은 자신을 발굴하고 후원해준 노먼 그란츠가 운영하는 버브 레이블이 어렵게 되자 이를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평소 여러 공연에서 자주 요청 받는 곡들을 모아 연주함으로써 대중적인 면을 적극 강조하고자 했던 것. 그 결과 조금만 개방된 마음으로 듣는다면 재즈와 거리가 먼 사람도 매력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쉽고 편한 연주가 담겼다. ‘Corcovado’를 시작으로 ‘Have You Met Miss Jones?’ ‘You Look Good To Me’등의 스탠더드 곡들이 연주되었는데 이들 곡들을 오스카 피터슨은 특유의 가볍고 날렵한 터치와 스윙감으로 재즈의 가장 기본적인 매력을 편하게 느끼게 해준다.

The Paris Concert (Pablo 1978)

오스카 피터슨은 냇 킹 콜을 계승한 기타와 베이스가 함께하는 트리오 편성의 연주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서 이 편성으로 공연을 펼치곤 했다. 1978년 10월에 파리에서 있었던 공연도 그랬다. 조 패스(기타), NHOP(베이스)와 함께 했던 이 공연에서 오스카 피터슨은 이 색다른 트리오가 지닌 대가적 기질을 유감 없이 드러냈다. 특히 그의 피아노를 중심으로 기타와 베이스가 열정적으로 스윙하며 이어나가는 긴밀한 대화는 트리오가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닌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한편 ‘Medley: Manha de Carnaval/If’에서는 리듬 뒤에 자리잡고 있었던 오스카 피터슨의 멜로디적 감각을 맛볼 수 있다. 사실 이 무렵의 오스카 피터슨의 앨범들은 모두 완성도 높은 연주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서정적인 측면이 추가되었다는 이유로 이 앨범을 추천한다.

3 COMMENTS

  1. 처음엔 가늘고 고른 알갱이의 쉼없는 음표들과 저 거구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쏟아지는 음의 홍수를 이렇게 구석구석 적재적소에 꽉꽉 채워넣으려면 저정도 거구의 스테미너가 아니었으면 불가능 했겠구나 이내 깨닫게 되었죠. 가끔 꺼내듣는 romance라는 엘피에서 본인의 반주에 느릿느릿 스탠더드를 부르는 목소리는 따뜻하고 수수한 운치가 있으시더군요. 기름기가 빠진 넷킹콜같다고 할까요..ㅎ
    버브앨범에서는 그의 이름이 너무 흔해서 엘피슬리브에 피아노 주자 이름이 없는 경우엔 그냥 알아서 피터슨이겠거니 하고 들었습니다. 버브의 공무원.. 상임상근연주자..
    패스와 페데르센의 전쟁같은 시카고 실황은 있는데 서정성이 추가된 파리실황이라니 또 궁금해 집니다. 앞으로 파블로의 음반들을 천천히 구해가며 듣고 싶네요.

    • 그렇지 않아도 오스카 피터슨이 냇 킹 콜을 주제로 앨범 을 녹음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노래를 불렀죠. 그런데 냇 킹 콜과 상당히 흡사합니다. ㅎ 한번 들어보시죠. 매우 구수하고 좋습니다.ㅎ

    • 냇킹콜을 아주 잘 부르셨을거 같네요.ㅎ 오늘같은 추위에 낯선청춘님 홈페이지엔 눈발까지 날리니 냇킹콜의 뜨거운 꿀물같은 목소리가 더욱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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