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h – Gentle Rain (지누락엔터테인먼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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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이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을 때 심지어 내일도 오늘과 그리 다를 바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 때면 우리는 신선한 무엇을 바라게 된다. 그러한 단조로운 풍경을 새롭게 만드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만큼 확실히 눈 앞의 풍경을 바꿔버리는 것이 있을까? 라르게토(Larghetto)의 속도로 세상을 촉촉히 적시는 비를 바라보거나 그 아래를 걸을 때면 우리는 잠시나마 하루가 새로워짐을 느끼곤 한다. 게다가 그 비가 그치고 난 후에는 먼지 없이 한결 깨끗해진 풍경에 감탄한 나머지 삶의 새로운 희망을 꿈꾸기도 한다.

드럼 연주자 서덕원을 중심으로 피아노 연주자 김지훈, 베이스 연주자 김호철로 구성된 트리오 젠틀 레인은 그렇게 늘 보던 것이지만 비로 인해 신선하게 다가오는 세상, 나아가 비 갠 후의 청명한 세상을 그린다. 말하자면 그들의 음악은 부드러운 비와도 같은 것이다. 실제 우리는 석 장의 정규 앨범 <Into The Gentle Rain>, <Second Rain>, <Dreams>와 한 장의 특별 앨범 <Sonagi Project> 등을 통해 트리오만의 부드러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 그들의 음악을 통해 단조롭고 건조한 우리네 삶을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네 번째 앨범 <Wish>에서도 유효하다. 이번 앨범에서 트리오는 다시 한번 감성적인 선율과 촉촉한 연주로 우리네 일상의 먼지를 걷어내고 그 아래 감춰진 기쁨과 희망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트리오가 아주 거창한 인생론을 펼친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소박한 자기네 경험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베이스 연주자 김호철이 2012년 봄에 태어난 자신의 딸을 위해 만든 곡 ‘Hoya’나 피아노 연주자 송지훈이 자신의 둘째 아이가 박수 치는 것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Clap Clap Clap’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트리오의 일상적 경험에 기반한 연주는 트리오가 그리는 희망과 긍정을 뻔하디 뻔한 교과서적 교훈이 아니라 친구의 진솔한 경험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기에 레몬과 아몬드의 조합을 의미한다는 독특한 제목의‘Lemond’,  ‘Strawberry Juice’같은 곡에 담긴 여유롭고 사랑스러운 하루의 정서 또한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하루가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한편 앨범에서 가장 서정적이라 할 수 있는 발라드 곡‘Starlight’이야 말로 트리오의 정서적 지향점을 잘 설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흐린 밤 하늘에 쓸쓸히 떠 있는 한 두 개의 별을 그렸다는 이 곡은 우수에 빠질 듯 하다가 이내 일체의 고민, 불안이 사라진 차분하고 평화로움으로 감상자를 이끈다.

삶을 조금은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세 남자가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를 비현실적이라 거부할 지도 모른다. 특히 엄숙주의자들은 트리오의 서정을 간지럽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화려하지 않다고 해서 트리오가 정서를 위해 연주를 희생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트리오의 서정적 사운드는 감성이 아닌 이성에 기반한 치밀한 고려와 탄탄한 호흡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위해 유봉인의 보컬이 가세한‘Amazing Grace’을 들어보자. 보통 경건하게 노래되곤 했던 이 종교적 성격의 곡을 트리오는 산뜻하고 가볍게 바꾸어 연주한다. 여기에는 가벼운 레개 리듬의 신선한 사용이 큰 역할을 했다. 버트 바카락의 곡을 연주한 ‘Rain Drops Keep Fallin’ On My Head’는 어떤가? 뜻밖의 3박자 리듬이 자유로이 떨어지는 빗방울의 상쾌함을 그리게 하지 않는가? ‘Drive’같은 곡도 그렇다. 표면에 드러나는 드라이브의 설렘 뒤에는 트리오의 직선적인 연주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이미 디지털 싱글로 발매되기도 했던 두 곡, 바흐의 클래식을 연주한 ‘Air On G String’과 벤 E 킹의 올드 팝 ‘Stand By Me’에서도 트리오는 재즈 특유의 자유로운 호흡으로 곡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나간다. 그 연주 방향에 긍정과 밝음을 지향하는 트리오의 세계관이 투영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트리오의 리더 서덕원으로부터 앨범의 라이너 노트를 의뢰 받았을 때는 십 수년만의 폭염과 열대야가 한창일 때였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를 정도로 너무 더운 나머지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한 무력감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앨범을 받았을 무렵부터 공기가 조금씩 선선해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다. 아직 8월 중순이니 조금은 성급한 생각일 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비가 한 두 차례 더 내리면 시간은 청명한 가을로 흘러가리라. 확실히 계절의 변화는 비로 시작된다.

단조로운 우리의 하루도 비를 통해 새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비를 우리의 일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음악을 들어보기 바란다. 듣기 좋은 음악 하나가 우리의 하루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트리오 젠틀 레인이 음악을 통해 이루고 싶은 바람(Wish)도 그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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