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나 크롤 주연의 기분 좋은 1920년대식 쇼.
국내에도 개봉되었던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Midnight In Paris>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질 펜더는 1920년대의 파리, 그것도 비가 내리는 파리에 짙은 향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시절의 삶이 더 행복했으며 예술 또한 가장 낭만적이었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결혼 전에 파리로 여행을 옵니다. 그런데 술에 취해 길을 걷다가 자정 무렵 우연히 오래된 푸조 자동차(Type 176)를 타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는 시간으로 가로질러 그가 그토록 원했던 1920년대의 파리를 만나게 됩니다. 장 콕토를 시작으로 젤다와 스콧 핏제랄드 부부, 거트루드 스타인, 조세핀 베이커, 어네스트 헤밍웨이, 콜 포터,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만 레이, 루이스 브뉘엘 등 1920년대 파리를 장식했던 작가, 화가, 작곡가, 무용가, 영화 감독, 사진 작가 등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참으로 환상적인 일인데요. 실제 영화 속 질 펜더처럼 1920년대의 파리를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실상은 1타 대전 이후 불안으로 가득한 상실의 시대였는데도 말이죠. 물론 이 시기의 파리가 세계 각국에서 온 예술가들로 인해 패션, 음악, 문학, 미술 등 문화 전반에 걸쳐 화려한 꽃을 피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디 앨런 감독이 1920년대의 화려함과 이에 대한 현대인의 향수를 주제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다이아나 크롤도 1920년대에 대한 짙은 향수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앨범에서 1920년대와 30년대의 곡들을 노래하고 있거든요. 그녀는 이번 앨범을 소개하면서 ‘만약 내가 선택하여 돌아갈 수 있는 시대가 있다면 그것은 1920년대일 거에요. 모든 면에서 야성적인 맛(Wildness)이 있기 때문이죠.’라고 합니다. 여기서 야성적이란 말은 음악을 비롯한 그 시대의 문화가 지금보다는 훨씬 꾸밈이 덜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떻게 그녀는 살아보지도 않은 시대에 대해 짙은 향수를 갖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영향인지 모르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이 시기의 노래를 자주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시기의 음악을 담은 78회전 SP앨범들을 소장하고 있구요. 그러니까 지난 시대에 대한 향수는 어쩌면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음악을 듣고 따라 부르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인 거죠.
그녀가 이 향수를, 그리움을 정규 앨범으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에는 음악적인 고민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재즈 연주자라면 늘 자신의 음악을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싶어합니다. 설령 재즈의 전형을 대변하는 것 같은 연주자나 보컬이라도 그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합니다. 다이아나 크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냇 킹 콜 트리오의 유산을 계승한 앨범부터, 미풍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앨범, 브라질의 낭만을 담은 보사노바 앨범, 빅 밴드와 함께 한 앨범, 작곡가로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 앨범 등 앨범마다 변화를 주곤 했습니다.
그런 중 지난 2009년 브라질 여행 끝에 만들었던 앨범 <Quiet Nights> 이후 그녀는 더욱 더 새로운 음악을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새롭다고 아무 시도나 할 수는 없는 법. 잘 알려진 스탠더드 곡들을 자기 식대로 노래했던 것처럼 그녀는 지난 시대의 익숙함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영감을 얻기로 했습니다. 그 때 어린 시절부터 들었고 지금도 집 한 켠에 쌓아둔 오래된 78회전 SP 앨범들이 생각났습니다. 이 앨범들에서 그녀는 오래되었지만 매력을 잃지 않은 곡들을 골랐습니다.
그 결과 이번 앨범은 여러모로 1920년대의 풍경을 상상하게 합니다.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We Just Couldn’t Say Goodbye’부터 다이아나 크롤은 마치 고전과 현대가 교차했던 1920년대 살롱에서 가벼이 춤을 추며 노래하는 여인을 그리게 합니다. 살짝 물먹은 듯한 소리를 내는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고 여기에 기타나 반조, 베이스, 드럼이 단순 담백한 리듬을 연주하는 것에 맞추어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관능적인 여인이 노래하는 것이죠. 이것은 ‘There Ain’t No Sweet Man That’s Worth the Salt of My Tears’, ‘You Know – I Know Ev’rything’s Made for Love’ 같은 곡을 통해 이어집니다.
한편 목가적인 분위기의 ‘Prairie Lullaby’나 기타 반주만 있는 ‘Glad Rag Doll’ 같은 발라드 곡이 중간 중간 배치된 것을 보면 다이아나 크롤이 보드빌(Vaudeville) 쇼를 염두에 두고 앨범을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보드빌 쇼란 189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에 유행했던, 하나의 줄거리를 두고 이를 배우의 만담과 춤 노래로 풀어나가는 쇼입니다. 이러한 쇼적인 이미지는 앨범의 마지막 곡 ‘When the Curtain Comes Down’에서 확실해집니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애잔한 분위기가 공연을 마치고 다시 다른 곳을 향해 짐을 꾸려야 하는 유랑 극단을 연상시키지 않던가요?
여기에 앨범 표지도 1920년대의 복고적 이미지를 더욱 강화합니다. 이전까지는 우아한 모습으로 여신의 자태를 뽐내곤 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관능적인 (속)옷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1920년대를 풍미한 유명 사진 작가 알프레드 체니 존스톤이 뮤지컬 <지그펠트 폴리스 Ziegfeld Follies>에 출연한 여성들을 찍은 사진들-다소 핀업걸의 느낌이 나는-을 차용한 것입니다. 다이아나 크롤이 이 사진들을 좋아해서 의상 디자이너 콜린 앳우드에게 옷을 의뢰하고 사진작가 마크 셀리거에게 부탁해 유사한 분위기로 사진을 촬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1920년대를 재현하는 것에 만족했다고 생각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사실 원곡이라면 모를까 지난 시대, 그것도 살아보지도 못한 시대를 재현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 꼭 그럴 필요도 없지요. 더구나 그녀는 늘 새로움을 찾는 재즈 보컬이 아니던가요? 이번 앨범에서도 복고적인 첫 느낌에서 나오면 그녀가 지난 시대의 흔적을 유지하려고만 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단 1920년대와 30년대 노래들 사이에 그녀는 그 이후의 노래들을 몇 곡 포함시켰습니다. 리듬 앤 블루스 성향의 1960년대 곡 ‘I’m A Little Mixed Up’, 1950년대를 풍미한 블루스 곡 ‘Lonely Avenue’, 그리고 이 시대의 곡이라 할 수 있는 포크 계열의 싱어송라이터 버디 밀러의 2004년도 곡 ‘Wide River To Cross’를 노래했는데요. 이 곡들은 앨범이 1920년대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앨범의 모든 곡들은 하나의 쇼를 위해 만들어진 듯 훌륭한 조화를 이룹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녀가 1920,30년대의 곡들도 무작정 원곡의 분위기에 의존하여 노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로 첫 곡 ‘We Just Couldn’t Say Goodbye’을 1920년대와 30년대 사이에 인기를 얻었던 기 롬바르도 앤 히스 카나디안이나 폴 화이트먼 밴드의 버전과 비교하면 다이아나 크롤의 노래는 복고적이긴 하되 건조한 울림은 무척이나 현대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적인 분위기는 제작자 T 본 버넷의 힘이 컸습니다. T 본 버넷은 록 음악쪽에서 활동하다가 최근에는 앨범 제작자로 이름을 얻고 있는 인물입니다. 다이아나 크롤의 남편인 엘비스 코스텔로의 앨범도 제작을 했던 적이 있죠. 아마도 엘비스 코스텔로가 그를 아내에게 추천했을 것입니다. 평소 그는 블루스나 포크 등의 색채를 가미한 앨범들을 제작하곤 했습니다. 그의 이런 성향을 다이아나 크롤은 잘 수용했고 그 결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앨범이 만들 수 있었던 것이죠.
처음 이 앨범을 들었을 때 저는 이전 앨범들에 비해 확연하게 변화된 사운드에 놀랐습니다. 2004년에 남편의 영향을 받아 녹음했던 앨범 <The Girl In The Other Room>도 이와 유사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래도 이번 앨범은 그보다 더 낯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쩌면 이번 앨범이 다이아나 크롤의 앨범들 가운데 가장 대중적이지 않은 앨범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신기하게도 앨범을 들으면 들을수록 새로운 느낌보다 익숙한 느낌이 강해집니다. 특히 앨범의 후반부를 장식하고 있는‘Let It Rain’, ‘Lonely Avenue’, ‘Wide River To Cross’묶음에 이르면 그녀의 편안하고 낭만적인 맛은 그대로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 어쩌면 이것이 이번 앨범에서 그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스타일이나 공간적 느낌은 달라도 우리를 매혹시켰던 그녀의 매력은 불변 하다는 것. 그래서 1920년대 풍의 복고적인 쇼도 그녀가 노래하면 그녀 밖에 할 수 없는 특별한 쇼가 된다는 것을 그녀는 이번 앨범에서 보여주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다이아나 크롤의 특별 쇼를 즐겨보시죠. 저의 추천사는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