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bsence – Melody Gardot (Verve 2012)

마음으로 여과한 여행의 추억, 그리고 충만감

삶이 단조롭고 건조하게 느껴질 때면 우리는 여행을 꿈꿉니다. 이 곳과는 다른 낯선 풍경 속에 잠시나마 몸을 두었다가 돌아오기를 희망하는 거죠. 그런데 그 여행이 오래된 건물, 유적 앞에서 사진이나 한 장 찍고 오는‘관광’이라면 좀 곤란하지 않나 싶습니다. 여행이 단순한 구경으로만 채워졌다면 그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당싱은 현실을 이전보다 더 건조하고 더 단조로운 것으로 느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당신의 삶은 더 피곤해지겠죠. 그러나 사진이 아니라 낯선 곳의 문화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여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여행의 기억과 경험은 삶에 활력을 주고 나아가 그 삶을 새로운 경지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여행은 그 규모가 어떤 것이건 꼭 필요합니다. 특히 삶의 새로운 페이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2009년에 선보인 두 번째 앨범 <My One & Only Thrill>로 재즈 보컬의 새로운 스타로 부상한 멜로디 가르도에게도 여행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앨범의 성공에 힘입어 서울을 포함한 세계 곳곳을 다니지 않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그녀에게 일상의 일부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세계를 순회하며 노래를 부르고 관객의 찬사를 받는 것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몸 여기저기에 큰 부상-특히 뇌 손상으로 인한 기억 능력의 이상이 심각했죠-을 입고 병실에 갇혀 있던 10대 후반에 비하면 감사를 거듭할 행복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만족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과 음악을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키길 바랬습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도 삶이란 낯선 것들, 새로운 것들과의 끊임 없는 만남을 통해 성숙해지고 새로워진다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요? 약 2년에 걸친 공연 활동을 마친 후 그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위해 모로코,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으로 자신만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행에서 그녀는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것은 2010년 여름 모로코의 마라케시를 향해 늦은 밤 사막을 가로지르는 중에 일어났습니다. 불현듯 그녀는 언어와 문화는 달라도 여행 중에 그녀가 접했던 여러 음악들이 정서적인 측면만큼은 서로 공통된 부분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적어도 그녀 자신의 음악과 통하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발견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거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그리고 브라질의 여러 해변을 여행하면서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행지의 일상을 구성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삶에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을 들을수록 비록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하루 하루를 살고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듣지만 기쁨과 슬픔의 정서는 통하는 부분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은 사진으로 남겼을 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을 음악으로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 <The Absence>입니다.

여행의 음악적 기록인 만큼 이번 앨범에는 보사노바, 탕고, 삼바, 파두 등 멜로디 가르도가 다녔던 여행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 저절로 그 지역을 상상하게 하는 여러 음악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앨범을 듣다 보면 저절로 여행을 꿈꾸게 됩니다. 예를 들면 첫 곡 ‘Mira’나 마지막 곡‘Yemanja’ 에서는 리오 데 자네이로의 해변이,‘So We Meet Again My Heartache’나 ‘Impossible Love’에서는 탕고가 여기저기 들리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가, 그리고 ‘Lisboa’에서는 그 제목이 말하듯 교회종이 멀리서 울리는 리스본의 한 거리가 떠오르는 것이죠.

그런데 그녀는 여러 음악 스타일로 자신이 거친 여행지들을 그저 관광 엽서처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앨범은 장르적인 특징에 경도된 그렇고 그런 앨범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말씀 드렸다시피 이 앨범은 여행 안내 책자가 아니라 그녀만의 여행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그윽한 스모키 보이스를 지닌 한 여성 보컬의 마음에 여과된 여행지의 추억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탕고, 보사노바, 삼바, 파두 등 여행지의 음악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대신 그 음악에 담긴 정서, 그녀의 마음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정서에 더 주목했습니다. 그 정서는 다름 아닌 슬픔과 희망입니다. 예. 그녀의 개성을 이루는 바로 그 두 가지 감정이지요. 이전까지 그녀는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슬픔과 이를 숙명으로 내면화하여 치유로 이끄는 희망을 아주 능숙하게 표현해 냈습니다. 특히 두 번째 앨범 <My One & Only Thrill>은 진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죠.

그 매력은 이번 앨범에서도 유효합니다. 그녀는 여행하면서 들었던 지역의 음악에서 슬픔과 희망의 정서를 뽑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들려줍니다. 탕고를 기반으로 그녀만의 블루스 감각을 결합한 ‘Goodbye’, 역시 우울한 비브라토가 감정을 아래로 이끄는 ‘Impossible Love’, 슬픔을 긍정하고 받아들인 고혹적인 분위기의 ‘If I Tell You I Love You I’m Lyin’’, 잔잔한 스트링 오케스트라의 사용으로 회색조의 고독을 달콤한 것으로 바꾸어 버린‘My Heart Won’t Have It Any Other Way’, 그리움이 묻어 나는 ‘So Long’ 같은 곡들이 대표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곡들은 그 아래 자리잡은 스타일을 넘어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슬픔과 치유에 관한 곡들이죠. 이 곡들을 듣다 보면 적어도 슬픈 분위기의 노래만큼은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그녀만의 전문성이 완성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편 ‘Amalia’, ‘Iemanji’, ‘Mira’같은 상대적으로 더 강한 이국적 느낌만큼 새로운 그녀의 모습을 만나게 해주는데요. 그 리듬의 특성상 상실 뒤에 찾아오는 희망의 순간을 멋지게 표현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다양한 음악 스타일과 그에 내재한 정서를 자기 식대로 멋지게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의 곡들을 여행하면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Amalia’는 포르투갈에서 상처 입은 비둘기를 구해 치료해주었던 일을, ‘Lisboa’는 새벽 두 시, 그녀를 알아보는 이 없는 리스본 거리를 걸었던 날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Mira’는 앨범의 타이틀 곡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 곡의 제목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Miravos’라는 감탄사에서 가져온 것이라 합니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뜻밖의 경탄의 순간에 사용하는 말을 자기 식대로 바꾼 것인데요. 여행 중에 자기 마음 속 어둠에 가려져 있던 밝음을 발견하고서 곡을 썼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모든 곡들이 다양한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그녀만의 것으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한편 이 앨범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정서를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멜로디 가르도의 여행기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독백이 아니라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느낌으로 앨범을 만들었기 때문인데요. 이것은 음악 외에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많은 여행의 추억과 음악적 영감을 안고 돌아와 이를 새 앨범에 담기로 한 그녀는 현명하게도 가슴에 담긴 음악을 꺼내 현실화할 수 있는 제작자를 찾기로 했습니다. 지난 앨범에서 래리 클라인이 했던 것처럼 말이죠. 이번에는 영화 음악 작곡가이자 기타 연주자인 헤이터 페레이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브라질 출신이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이 작곡가는 그녀가 만든 모든 곡을 편곡하고 기타를 연주하는 한편 ‘Lisboa’, ‘Amalia’, ‘Se Voce Me Ama(만약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같은 곡에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까지 하면서 그녀의 여행기를 음악으로 완벽히 표현해냈습니다. 따라서 이번 앨범이 지난 앨범만큼 깊은 호응을 얻게 된다면 그의 탁월한 제작능력이 큰 역할을 했음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앨범을 듣고 저는 멜로디 가르도가 이제 음악의 폭이 보다 넓어지고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한결 성숙해졌음을 느꼈습니다. 이 모두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얻은 것이겠지요. 물론 꼭 이러이러한 것을 갖고 돌아오겠다는 목표를 두고 여행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바쁜 일상을 벗어나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을 것입니다. 앨범 타이틀이 ‘The Absence’인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요? 이 앨범 타이틀은 ‘결여(缺如)’나‘결핍(缺乏)’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라진 현실’을 의미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나의 현실에 ‘부재(不在)’ 표시를 해놓고 어디론가 여행을 하는 것이 결국은 ‘상실(喪失)’을 ‘충만(充滿)’으로 바꾸는 것임을 그녀는 깨달았고 그것을 이 아름다운 앨범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잠시 마음을 비우고 앨범을 차근차근 들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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