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전형을 묵묵히 지켜나가고 있는 색소폰 연주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04년도 영화 <터미널>을 뒤늦게 보았다. 이 영화는 모국의 혁명으로 신분 상태가 모호해져 JFK 공항에서 발이 묶인 주인공 빅토르 나보르스키(톰 행크스)가 공항에서 생활하면서 겪는 일을 그리고 있다. 빅토르는 사진작가 아트 케인이 1958년 할렘에서 57명의 재즈 연주자들을 모아 놓고 찍은 ‘Great Day In Harlem’에 등장한 모든 연주자들의 사인을 받으려는 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은 한 명의 사인만 더 받으면 완성된다. 뉴욕에 오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57명의 연주자 가운데 빅토르 나브로스키가 마지막으로 사인을 받고 싶어했던 연주자는 바로 베니 골슨이었다. 재즈를 듣지 않는 사람들은 빅토르가 노장 색소폰 연주자의 사인 하나를 받기 위해 뉴욕에 온다는 설정 자체가 이해 가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영화 말미에 직접 등장해 가벼운 연기를 펼치는 베니 골슨의 모습 또한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리 특별하게 보이지 않을 듯싶다. 게다가 그가 연주하는 무대 또한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다. 그래서 이 색소폰 연주자가 그리 대단한 인물인가? 의문을 제기할 것 같다.
실제 베니 골슨의 활동은 다른 전설적 연주자들에 비해 비교적 평이한 편이다. 1929년 1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그는 음악적으로 재즈사에 기록될 만한 획기적인 무엇을 제시하지도 않았으며 스타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하드 밥으로 완성된 재즈의 전통 어법을 받아들이고 이를 지속시키는 역할에 더 충실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처음 그의 연주를 들었을 때부터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아트 블레이키 재즈 메신저스의 그 유명한 1958년도 앨범 <Moanin’>에서처럼 뜨거운 연주를 펼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하드 밥의 시대에도 스윙 시대의 낭만을 잊지 않았으며 기교를 절제하는 연주에 더 집중했다. 날카로움보다는 부드러움을 추구했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그는 솔로 연주자로서의 활동만큼이나 공동 리더로서의 활동에서 더 큰 매력을 발휘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트럼펫 연주자 아트 파머와 함께 했던 재즈텟(Jazztet) 활동이다. 이 재즈텟은 1959년부터 62년까지 삼 년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후에 80년대에 다시 한번 모이기도 했다-따뜻하고 정겨운 베니 골슨의 모습을 제대로 맛보게 해주었다. 또한 역시 재즈텟의 일원이었던 트롬본 연주자 커티스 풀러와 따로 펼쳤던 활동도 그가 얼마나 낭만적인 연주자인지 확인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른다면 재즈사는 색소폰 연주자 베니 골슨보다는 스탠더드 곡을 만든 작곡가 베니 골슨을 기억할 지도 모르겠다. 비밥 시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연주자들이 직접 곡을 만들어 연주하곤 했지만 베니 골슨의 곡은 그 가운데서 유난히 큰 사랑을 받았다. ‘I Remember Clifford’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지난 3월호에서 다루었던 트럼펫 연주자 클리포드 브라운이 1956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에 안타까움을 느껴 만들었던 이 곡은 지금까지도 자주 연주되고 있다. 이 곡 외에도 ‘Whisper Not’, ‘Killer Joe’, ‘Along Came Betty’, ‘Stablemates’, ‘Blues March’, ‘Five Spot After Dark’, ‘Are you Real?’ 등의 곡들이 스탠더드 곡으로 사랑 받고 있다. 이들 곡들은 재즈의 특성상 누가 연주하냐에 따라 분위기가 다양하게 변화되지만 기본적으로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베니 골슨의 연주처럼 말이다. 실제 베니 골슨이 직접 연주한 버전과 다른 연주자들의 버전을 비교하면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베니 골슨의 색이 기저에 유지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작곡가로서의 베니 골슨의 능력은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 사이에 더 큰 빛을 발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재즈 작곡가로서 이루어낸 것은 아니었다. 1962년 재즈텟 활동을 마무리 하고 그는 재즈와 거리를 두고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광고 음악 작곡에 몰두했다. 이것은 당시 미국 재즈의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재즈는 프리 재즈의 열풍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성향의 연주자들의 존재감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재즈를 갈수록 대중 음악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많은 기존 연주자들은 유럽으로 건너가 활동하거나 연주를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해야 했다. 베니 골슨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려워진 상황을 극복하려는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는 재즈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했을 때보다 더 좋았다. <M*A*S*H>, <미션 임파서블>, <육백만 달러의 사나이>, <빌 코스비> 같은 국내에서도 인기를 얻었던 유명 TV 시리즈의 음악을 작곡했을뿐더러 ‘쉐보레’, ‘크라이슬러’, ‘닛산’, ‘펩시 콜라’, ‘질레트’ 등의 유명 브랜드의 광고 음악을 만들었던 것이다.
재즈 밖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펼친 후 1970년대 중반 베니 골슨은 다시 재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는 10년 이상의 공백에도 예의 정감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1960년대 재즈계를 떠나야 했을 때처럼 1970년대 중반의 재즈계 또한 그에게 우호적인 상황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는 마치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는 듯 하드 밥의 어법으로 재즈의 기본은 변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베니 골슨의 재즈 연주자로서의 삶을 보면 그 스스로 재즈의 역사를 체험하고 이를 지금까지 지속시키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리 특별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왜 영화 <터미널>에서 주인공 빅토르는 베니 골슨의 사인을 받기 위해 이름 모를 동유럽의 한 나라에서 뉴욕까지 왔을까? 아니 그는 왜‘Great Day In Harlem’사진에 찍힌 57명 연주자들의 사인을 받으려 했던 것일까? 내 생각에 그는 사진에 찍힌 연주자들이 뛰어난 명인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재즈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를 증명하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즉 이후 더 치열하고 새로운 재즈의 흐름에 더 애착을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보수적인 발언으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그들 또한 1950년대 재즈가 재즈 하면 떠오르는 전형을 완성했음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 전형의 완성에 베니 골슨이 있었다. 그렇다면 베니 골슨이 지금도 탈 시간적인 하드 밥 연주를 펼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재즈의 역사를 두텁게 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베니 골슨의 위대함은 다른 무엇보다 오랜 시간 생존하여 재즈의 전형을 현재의 것으로 유지한 것에 있는 지도 모른다.
대표 앨범
Meet The Jazztet (Chess 1960)
베니 골슨은 부드럽고 따스한 톤과 이에 걸맞은 정겨운 연주가 매력이다. 그리고 이 매력은 아트 파머(트럼펫), 커티스 풀러(트롬본)과 함께 했던 재즈텟에서 가장 돋보였다. 특히 이 앨범은 그의 연주가 지닌 매력과 함께 재즈텟이라는 그룹의 훌륭한 사운드를 가장 잘 보여준다. 또한 작곡가 베니 골슨의 모습을 확인하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주목해야 한다. 대표 곡 ‘I Remember Clifford’를 비롯하여 ‘Blues March’, ‘Killer Joe’등 베니 골슨의 자작곡이 연주되었다. 이 곡들이 베니 골슨 특유의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분위기로 연주되었음은 물론이다.
Turn In Turn On (Verve 1967)
1962년 재즈텟을 해체한 이후 베니 골슨은 재즈를 떠나 상업 음악계에서 활발한 황동을 했다. 그래서 유명 TV 시리즈나 유명 브랜드의 광고 음악을 만드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앨범은 비록 그가 만든 곡을 연주한 것은 아니지만 이 무렵 베니 골슨의 모습을 확인하게 한다. 이전 하드 밥 시절의 베니 골슨과는 다른 지극히 대중적인 연주와 사운드를 들려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업적인 측면에서 그의 음악이 계속 재즈의 영역에 머물렀다는 것은 이후 그의 복귀의 근거가 됨을 생각하게 해준다.
Terminal 1 (Universal 2004)
베니 골슨은 자신을 언급한 영화 <터미널>의 마지막 장면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이 앨범은 이를 계기로 녹음되었다. 그렇다고 사운드트랙인 것은 아니다. 대신 베니 골슨이란 연주자의 탈 시간적 매력을 잘 보여준다. 영화와 관련된 첫 곡 ‘Terminal 1’과 외에는 그의 대표적인 자작곡과 스탠더드 곡들이 연주되었는데 모두 하드 밥이 재즈의 현재였던 시절, 베니 골슨의 청춘 시절을 그대로 상상하게 해준다. 베니 골슨이 나이와 상관 없이 자신만의 재즈를 꾸준히 추구하며 재즈의 전형을 지속시키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