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천재 트럼펫 연주자
재즈 연주자 가운데 일찍 세상을 떠난 연주자의 앨범을 들을 때면 나는 저절로 만약 이 연주자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예를 들면 피아노 연주자 빌 에반스의 트리오 멤버로서 재즈 트리오의 혁신을 이끌었던 베이스 연주자 스콧 라파로가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재즈계는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하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가정은 나뿐만 아니라 재즈를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도 하는 것이리라. 아마도 그런 상상 가운데 제일 많이 하는 경우가 트럼펫 연주자 클리포드 브라운에 대한 상상이 아닐까 싶다.
클리포드 브라운은 1956년 6월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교통사고였다. 당시 그는 버드 파웰의 동생인 리치 파웰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공연을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시카고로 여행을 떠날 일이 생겼다. 그래서 리치 파웰의 아내인 낸시가 운전대를 잡았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펜실바니아 주의 턴파이크를 지날 무렵 빗길에 차가 그만 미끄러졌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망은 지금까지도 재즈 평론가 사이에서 재즈사의 가장 참혹한 죽음으로 꼽힌다.
세상을 떠날 무렵 그는 디지 길레스피가 만들어 낸 트럼펫 연주의 역사를 계승하려던 참이었다. 그에게서 많은 사람들은 재즈 트럼펫의 미래를 보았다. 그러니 그가 20대 중반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에 아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클리포드 브라운이 더 오랜 삶을 누렸다면 어떻게 재즈사가 바뀌었으리라 생각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이 가정이지만 그가 장수했다면 현재의 재즈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재즈의 역사를 주도했던 마일스 데이비스가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쿨 재즈부터 퓨전 재즈에 이르는 다양한 재즈사조의 출현이 늦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클리포드 브라운을 높이 평가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이른 나이에 그가 완성도 높은 트럼펫 연주를 펼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빠른 속주에서도 음 하나 하나를 명확히 연주할 줄 알았다. 그리고 화성 부분에 있어서도 다른 비밥 연주자들에 비해 보다 과감하고 혁신적인 진행을 시도했다. 그러면서도 수학적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이러한 기술적인 측면 외에 정서적으로도 그는 상당한 매력을 발산 했다. 무엇보다 그는 그만큼이나 일찍 세상을 떠난 팻츠 나바로를 연상시키는 따뜻한 톤으로 연주를 펼쳤다. 여기에 발라드 연주에서 탁월한 멜로디적 감각을 뽐냈다. 그렇기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점이 그가 장수했더라면 비밥의 시대가 조금 더 오래 지속되면서 마일스 데이비스에 의해 주도되었던 재즈 역사의 10년 주기설이 파기되었으리라 가정하게 만드는 요인이라 생각한다.
일찍 세상을 떠난 만큼 그의 활동은 몇 년 되지 않았다. 15세부터 트럼펫 연주를 공부한 그는 3년 뒤인 1948년부터 직업 연주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시작부터 미래가 기대되는 연주자로서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사망에 이르는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에도 1950년에도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이 기간 중 그는 재즈 연주자로서의 미래를 고민했다. 하지만 디지 길레스피가 병원을 방문하여 연주자의 길을 꾸준히 이어 가라는 충고를 했다. 비밥의 혁명을 이끈 트럼펫 연주자의 눈에는 클리포드 브라운이 재즈계를 이끌 재목으로 보였던 것이다.
1948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지만 교통 사고로 오랜 기간 활동을 쉰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그의 활동 기간은 몇 년 되지 않는다. 특히 앨범 활동의 경우 1953년 6월부터 1956 6월까지 딱 3년간만 활동했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에 그는 많은 녹음을 남겼다. 그의 사후에 발매된 앨범까지 합치면 30장이 넘는 녹음을 했다. 그리고 그 앨범들은 모두 개성적인 비밥 사운드를 지녔다. 특히 드럼 연주자 맥스 로치와 함께 이끌었던 퀸텟은 당시 동료 연주자나 후배 연주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글쎄. 모르겠다.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에 그 아쉬움에 그가 더 생존했다면 재즈 역사가 바뀌었으리라 가정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느 늦은 밤 그가 여성 보컬 사라 본이나 헬렌 메릴과 함께 한 앨범이나 스트링 오케스트라를 대동한 <Clifford With Strings>같은 앨범을 들어보라 기교의 혁신을 떠나 그의 연주가 정서적인 감흥을 이끌어 냄을 느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삼 그의 이른 사망에 애도를 표하게 될 것이다. 그의 사망을 안타까워하며 ‘I Remember Clifford’을 작곡했던 색소폰 연주자 베니 골슨처럼 말이다.
대표 앨범
Study In Brown (EmArcy 1955)
클리포드 브라운의 앨범 활동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그는 여러 문제작들을 발표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대표 앨범은 1955년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드럼 연주자 맥스 로치와 함께 퀸텟을 이끌 때였는데 <Study In Brown> 또한 1955년 맥스 로치와 함께 할 무렵에 녹음 되었다. 이 앨범은 하드 밥의 초기 스타일을 간직한 앨범으로 평가 받고 있다. 특히 ‘Cherokee’에서 클리포드 브라운이 펼친 솔로는 재즈사를 빛낸 명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리고 그가 작곡한 ‘Sandu’는 여러 연주자들에 의해 연주되면서 재즈 스탠더드 곡으로 자리잡았다.
Clifford Brown & Max Roach (EmArcy 1955)
클리포드 브라운의 이름으로 발매된 앨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앨범이다. 드럼 연주자 맥스 로치와 함께 녹음한 이 앨범을 두고 뉴욕 타임즈는 비밥 그룹이 펼칠 수 있는 연주의 결정을 보여주었다는 평을 내렸다. 그러면서 재즈사의 중요한 앨범 100선 가운데 34번째로 이 앨범을 언급했다. 그리고 1999년에는 그래미상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앨범에 수록된 곡 가운데‘Daahoud’와 ‘Joy Spring’은 여러 연주자들이 즐겨 연주하는 스탠더드 곡이 되었다. 그 외에 단순함의 매력을 보여준 ‘Delilah’, 클리포드 브라운의 탁월한 솔로가 돋보이는 ‘Parisian Thoroughfare’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Clifford Brown With Strings (EmArcy 1955)
클래식에 대한 열등감 때문일까? 찰리 파커를 비롯한 많은 재즈 연주자들은 궁극적인 목표로 스트링 오케스트라와 함께 앨범을 녹음하기를 꿈꿨다. 클리포드 브라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1955년 스트링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앨범 <Clifford Brown With Strings>를 녹음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앨범은 찬반의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부정적인 견해는 닐 헤프티의 오케스트라 편곡이 재즈의 매력을 반영하지 못하고 평범한 경음악 수준에 머물렀다는데 있다. 하지만 특유의 따뜻한 톤으로 연주하는 클리포드 브라운의 솔로만큼은 극찬을 받았다.
프레이징과 사운드 모두에서 들을때마다 감탄합니다. 만약에 더 오래 살았더라면.. 과연 프리재즈를 했을까.. 가끔 궁금해집니다. 역시 잘했을거 같기도하고 길레스피처럼 이미 완성된 세계에 머물러 끝없는 여행을 계속했을거 같기도하고.. 어떤길을 갔더라도 저는 그 모든 음반을 다 사 모으고 있었겠죠.
늘 가정은 흥미롭지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상상이니 말이죠. 클리포드 브라운은 그 중 더 흥미로운 길입니다. 하지만 갈수 없는 것이 확정된 지 모래이니 그냥 상상으로만 그쳐야죠. 고맙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