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의 시기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트럼펫 연주자
이유 없이 힘이 빠질 때, 그래서 무기력감을 느낄 때면 나는 습관적으로 리 모건의 Sidewinder의 멜로디를 흥얼거리곤 한다. 24마디로 구성된 이 곡의 테마는 블루스의 형식을 다르면서도 펑키한 맛이 일품이다. 게다가 연주 시간도 10분이 넘어 끝까지 한번 듣고 나면 적어도 400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헐떡거리게 된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한 바퀴 더 돌고 싶은 의욕을 받기도 한다. 여기에는 테마가 같은 선율이 반복되는 형식으로 이루어 진 탓도 크다. 이 곡의 제목이 ‘방울뱀’인 것도 이 때문이리라. 지그재그로 몸을 움직이며 앞으로 나가는 뱀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리 모건은 이 곡을 삶의 방황기에 재기의 의지를 다지며 만들었다. 여기서 내가 ‘재기’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은 이 곡을 만들 당시 리 모건의 나이가 비록 25세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한 차례 전성기를 거쳤기 때문이다. 1968년생인 그는 18세부터 전문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를 천재 연주자니 하면서 과도하게 추앙할 필요는 없다. 당시 상당수의 연주자들이 일찍이 전문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의 첫 밴드는 디지 길레스피 빅 밴드였다. 경제적인 이유로 밴드가 해산할 때까지 이 밴드에서 약 일년 반을 머물렀다. 그리고 1956년 밴드가 해산되면서 곧바로 리더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7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16년간 30장 이상의 앨범을 녹음했다. 말하자면 한 해에 두 장 가량의 앨범을 녹음한 셈인데 이 정도면 아무리 당시의 앨범 제작 풍토가 마음 맞는 연주자끼리 모여 공연을 하듯 단번에 녹음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지라도 상당히 왕성한 활동이었다.
1956년 첫 리더 앨범으로 <Lee Morgan Indeed!>를 발표하면서부터 그는 단번에 재즈 트럼펫의 역사를 계승할 연주자로 인정 받았다. 특히 그는 클리포드 브라운의 후계자라고 평가 받았는데 실제로 그는 선배 트럼펫 연주자에게 잠깐 트럼펫을 배운 적도 있었다. 리더 활동 초기부터 그의 연주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긴 호흡으로 여유롭게 연주를 하면서 부드럽고 우아하게 멜로디를 이어나갔기 때문이었다. 당시 트럼펫 솔로의 대부분이 날카로운 톤으로 빠르게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상당한 개성이었다.
이 트럼펫 연주자는 리더 활동을 하면서도 세션 활동을 즐겼다. 그 가운데에는 존 콜트레인의 명반 <Blue Train>에서의 연주와 아트 블레이키의 재즈 메신저스의 멤버로 활동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그 가운데에 재즈 메신저스에서의 활동은 그에게 보다 더 빨리 정상의 트럼펫 연주자라는 평가를 받게 해주었다. 특히 재즈 메신저스의 1958년도 앨범 <Moanin’>은 재즈 메신저스 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상당한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바른 성공은 언제나 급격한 몰락을 가져온다고 했던가? 너무 일찍 성공가도를 달렸는지 그는 마약 중독으로 정상적인 연주활동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재즈 메신저스의 피아노 연주자 바비 티몬스도 그랬다.) 그래서 아트 블레이키는 과감하게 정상의 밴드를 해체하는 마음으로 바비 티몬스와 리 모건을 퇴출시켰다. 그런데 참으로 모순적인 것이 리 모건에게 마약(헤로인)을 알게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아트 블레이키였다는 사실이다. 모르겠다. 아트 블레이키는 마약을 하면서도 자신을 지켰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가 리 모건을 밴드에서 내쫓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상당한 부조리로 기억된다. 이런 모순적 상황 때문인지 리 모건은 솔로 활동마저 멈춘 채 고향인 필라델피아로 돌아갔다. 그리고 연주를 멈춘 채 마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쳤다. 그래서 재즈계에서는 한 때 정상의 트럼펫 연주자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면서 그는 틈틈이 곡을 썼다. 그 곡들 중 하나가 바로 ‘The Sidewinder’였다. 이 곡을 타이틀로 그는 1963년 앨범을 녹음하고 재기를 시도했는데 그것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10붐이 넘는 대 곡이면서도 빌보드 차트에 오를 정도로 곡이 커다란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특히 이 곡의 대중적 성공은 재즈계에 비슷한 분위기의 곡-흔히 부갈루 사운드가 불리는 곡을 만드는 유행을 가져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색소폰 연주자 행크 모블리의 1965년도 앨범의 타이틀 곡 ‘The Turnaround’였다. 실제 24마디의 반복적인 테마로 이루어진 이 곡을 들으면 저절로 ‘The Sidewinder’가 생각난다.
앨범 <The Sidewinder>의 성공 이후 리 모건은 새롭게 음악에 눈을 뜨기라도 한 듯 완성도 높은 앨범을 연이어 발표했다. 1965년에 발표한 <Conbread>같은 앨범이 대표적이다. 한편 1960년대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인종차별을 받는 흑인들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다양한 투쟁이 있었다. 이에 관심을 갖고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2년간 인권운동의 리더로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왕성한 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33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지금은 물롱 이후 재즈사에서도 꾸준히 언급되게 될 정도로 비극적인 사건에 의해서였다. 클럽 공연 중 자신의 아내가 쏜 총에 의해 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총을 겨누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리 모건이 마약을 당시에 다시 남용했거나 아내 모르게 부정을 저질렀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너무 이른 사망이었기 때문인지 재즈사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리 모건의 사망에 대해 상당한 아쉬움을 표하건 한다. 특히 헛된 상상일 지는 모르지만 호사가들은 그가 10년만 더 활동했다면 재즈계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에 대해 이런저런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나 또한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만약 그가 10년만 더 살아서 앨범 활동을 했다면 마일스 데이비스나 도날드 버드 등에 의해 이끌어진 퓨전 재즈 스타일의 트럼펫 연주가 조금은 늦춰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재즈 트텀펫의 가상 지형도를 그리곤 한다.
사실 어떤 삶이건 간에 세상에 무엇인가 하나의 흔적-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을 남기면 나름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다면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산 리 모건은 그래도 성공한 삶을 살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적어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흥얼거리는 ‘The Sidewinder’는 남았으니 말이다.
대표 앨범
Candy (Blue Note 1957)
<The Sidewinder>이전에도 그는 정상의 솔로 연주자로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1957년은 그에게 있어 1차 전성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때였다. 이 무렵 그는 선배 트럼펫 연주자 클리포드 브라운을 긍정적으로 흡수하여 기술적인 면에서 대가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멜로디 연주에서 상당한 실력을 드러냈다. ‘Since I Fell For You’, ‘All The Way’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Dl 곡들을 그는 하드 밥 특유의 호방함에 달콤함을 섞어 연주했다. 1958년 아트 블레이키의 부름을 받게 된 것도 어쩌면 이 앨범에서의 연주 때문이리라.
The Sidewinder (Blue Note 1963)
마약 중독으로 인해 몸담았던 아트 블레이키의 재즈 메신저스에서 쫓겨난 후 그는 고향 필라델피아에서 머무르며 재기를 준비했다. 그래서 복귀하면서 이 앨범을 녹음하는데 이 앨범이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다시 정상의 트럼펫 연주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여기에는 타이틀 곡 ‘The Sidewinder’의 큰 인기 때문이었다. 실제 이 곡은 누구나 한번 들으면 기억하게 될 정도로 인상적인 테마와 흥겨운 리듬을 지니고 있다. 이 곡 외에도 ‘Hocus Pocus’같은 곡이 유명하다.
Cornbread (Blue Note 1965)
<the Sidewinder>의 성공 이후리 모건은 다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 가운데 여러 문제작들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앨범도 그 중 하나에 속한다. 이 앨범에서 그는 ‘The Sidewinder’와 함께 그를 대표하는 곡이 될 발라드 곡 ‘Ceora’를 비롯하여 여러 곡에서 하드 밥의 어법 특유의 긴장과 펑키한 밝음을 결합시킨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그 결과 현재 대중적인 측면에서는 <The Sidewinder>가 최고였다면 음악적으로는 이 앨범이 최고였다고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