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벌의 미묘한 울림으로 그림을 그렸던 드럼 연주자
지난 11월 22일 드럼 연주자 폴 모시앙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悲報)가 들렸다. 비록 나이가 많았지만 2011년 한 해 동안 리더 앨범-결국 그의 마지막 리더 앨범이 된- <The Windmill Of Your Mind>를 비롯해 사이드 맨으로 참여한 넉 장의 앨범을 발표했던 그였기에 그의 부고(訃告)는 의외였다. 특히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에도 그가 사이드 맨으로 참여한 색소폰 연주자 빌 맥헨리의 앨범 <Ghosts Of The Sun>이 발매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드럼 스틱을 놓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폴 모시앙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왕성한 활동을 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그가 재즈 드럼의 새로운 연주법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그는 재즈사에 큰 별로 기록되어야 한다. 사실 리듬 연주를 놓고 본다면 아트 블레이키나, 맥스 로치, 로이 헤인즈 등의 동료 거장들에 비해 뛰어나다고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 리듬 연주자로서의 그의 능력이 다소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 우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애초에 폴 모시앙의 연주가 리듬 보다는 독자적인 길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리듬을 안으로 감추고 단속적인 타악기 소리의 미묘한 질감을 사용한 연주를 즐겼다. 그래서 그의 연주는 공간적인 느낌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면 그는 스틱으로 타악기를 치는 순간의 중요성만큼 그 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지는 것 또한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연주의 강약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그 결과 그의 연주는 여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수묵화 같은 느낌을 주곤 했다. 이것은 분명 다른 연주자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그만의 것이었다.
사실 폴 모시앙은 재즈계에 제대로 된 주목을 받게 되었을 때부터 단순한 리듬 연주자를 넘어서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1954년 전문적인 드럼 연주자의 삶을 시작해 한 때 텔로니어스 몽크의 밴드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의 이름이 주목 받게 된 것은 바로 1959년 빌 에반스와 트리오 활동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알려졌다시피 빌 에반스는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트리오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베이스와 드럼이 리듬을 반복적으로 연주하고 그 위에 피아노 솔로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세 악기가 자신만의 연주를 펼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빌 에반스의 의도에 맞는 연주자는 리듬 연주만큼 솔로 연주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 적절한 드럼 연주자가 바로 폴 모시앙이었다.
이것은 빌 에반스 트리오의 역작 <Waltz For Debby>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빌 에반스가 자신의 조카 데비의 아장아장 걷는 걸음걸이를 보며 만들었다는 3박자 왈츠 풍의 타이틀 곡에서 그의 드럼 연주는 상당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는 다른 연주자들이 보다 편하게 솔로를 펼칠 수 있도록 3박자의 리듬을 한 박 반씩 두 개로 나눈 연주를 펼쳤다. 그 결과 연주는 마치 2박 혹은 두 마디 단위의 4박으로 이루어진 곡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아름다운 긴장이 곡에 부여되었다.
이처럼 시대를 앞서가는 연주를 펼쳤기에 그처럼 진보적인 성향의 연주자들이 그를 자신의 밴드에 불렀다. 폴 블레이, 키스 자렛, 레니 트리스타노, 칼라 블레이, 원 마쉬, 리 코니츠, 찰리 헤이든, 돈 체리 같은 연주자들이 대표적이다.
1972년 ECM에서의 앨범 <Conception Vessel>을 시작으로 그는 리더 앨범을 꾸준히 녹음했다. 그런데 많은 피아노 연주자가 그와 함께 했음에도 그는 정작 자신의 리더 앨범만큼은 피아노 연주자보다 기타 연주자와 함께하기를 즐겼다. 여기에는 그가 드럼을 연주하기 전에 기타를 먼저 연주했다는 것이 원인으로 작용한 듯하다. 그 가운데 기타 연주자 빌 프리셀과 색소폰 연주자 조 로바노와 함께 한 트리오는 그의 음악 미학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다. 실제 트리오의 연주를 들어보면 리듬보다는 심벌의 미묘한 울림으로 다채로운 색을 내는 폴 모시앙의 드럼 연주만큼 빌 프리셀의 기타 또한 우주적인 톤으로 여백을 충분히 살리며 공간에 퍼지는 연주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조 로바노의 색소폰 연주도 마찬가지. 비록 단선율을 연주하지만 그 또한 두 연주자가 마련한 공간의 여백을 유영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빌 프리셀-조 로바노가 함께 한 트리오를 기본으로 폴 모시앙은 1980년대 일련의 뛰어난 앨범들을 녹음했다. 그 가운데 베이스 연주자 마크 존슨-빌 에반스의 마지막 베이스 연주자였다-을 추가하여 녹음한 빌 에반스 추모 앨범 <Bill Evans: Tribute to the Great Post-Bop Pianist>(1990)는 폴 모시앙의 미학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명작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폴 모시앙은 일렉트릭 비밥 밴드라는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되었다. 이 밴드는 연주자의 변동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색소폰-베이스-드럼에 두 대의 기타가 함께 하는 특이한 편성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이 밴드를 결성하면서 그는 이후 재즈계의 리더가 되는 젊은 연주자들을 대거 기용했다. 그 결과 조슈아 레드맨, 크리스 포터, 크리스 칙 같은 색소폰 연주자들부터 커트 로젠 윙클, 벤 몬더, 볼프강 무스피엘, 스티브 카드나스 등의 기타 연주자들이 대 선배와 함께 할 수 있었고 나아가 이후 연주자로서 탄탄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2000년부터 그는 일본출신 피아노 연주자 마사부미 기구치와 밀접한 호흡을 유지하면서 일렉트릭 비밥 밴드의 젊은 연주자들과 프리셀, 조 로바노 트리오의 멤버들을 선택적으로 기용하며 일렉트릭 비밥 밴드를 확장한 듯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이처럼 다채로운 편성으로 그는 많은 뛰어난 앨범들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스탠더드 곡 가운데에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가져온 곡들을 연주한 <On Broadway> 시리즈와 뉴욕 빌리지 뱅가드 클럽에서의 공연을 담고 있는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시리즈 앨범들은 그의 음악을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이 글을 계기로 폴 모시앙의 앨범들을 다시 한 번 들어보았다. 2000년대에 녹음된 앨범은 물론 1970년대나 80년대에 녹음한 앨범마저 막 녹음된 것 같은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이 드럼 연주자가 시대를 앞선 연주를 펼쳤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와 같은 드럼 연주자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미 그처럼 리듬이 아니라 소리의 질감을 이용하여 드럼을 연주하는 연주자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폴 모시앙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던 연주자가 있을 지는 아직 난 모르겠다.
대표 앨범
Bill Evans: Tribute to the Great Post-Bop Pianist (JMT 1990, Winter & Winter 2003)
폴 모시앙은 빌 에반스 트리오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빌 에반스와의 협연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확립했다. 그러므로 이 피아노 연주자에 대한 헌정 앨범을 녹음하는 것은 어느 정도 예정된 일이었다. 그런데 빌 에반스의 곡들을 연주하면서 그는 의외로 피아노를 편성에 넣지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빌 에반스를 대신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한편 폴 모시앙 자신의 음악은 기타를 중심으로 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결과 빌 에반스를 그리워하게 하면서도 폴 모시앙의 색이 강한 멋진 헌정 앨범이 만들어졌다.
I Have The Room Above Her (ECM 2005)
폴 모시앙은 빌 프리셀, 조 로바노와 함께 1980년대에 트리오를 이루어 여러 장의 뛰어난 앨범을 녹음했다. 하지만 1990년대 폴 모시앙이 신인 연주자들의 발굴과 피아노 연주자 마사부미 기구치와의 활동에 주력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활동을 멈추게 되었다. 그러다가 18년 만에 이 앨범을 통해 다시 함께 하게 되었다. 이 오랜만의 트리오 연주에서 세 연주자는 그동안 솔로 활동으로 닦은 음악적 내공을 드러내는 한편 상대의 연주를 경청하는 겸손 속에서 긴밀한 연주를 펼쳤다. 그 결과 앨범은 세 연주자가 함께 한 앨범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이 되었다.
Holiday for Strings (Winter & Winter 2002)
1990년대 폴 모시앙은 두 대의 기타가 포함된 독특한 편성의 일렉트릭 비밥 밴드를 결성했다. 이 밴드는 당시 막 주목 받기 시작한 신인 연주자들이 참여했던 만큼 신선한 포스트 밥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도 비밥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지 또한 보여주었다. 벤 몬더와 스티브 카드나스의 트윈 기타에 두 명의 색소폰 연주자 크리스 칙과 피에트로 토놀로, 그리고 베이스 연주자 앤더스 크리스텐센이 폴 모시앙과 함께 한 이 앨범도 마찬가지. 특히 두 기타가 발산하는 몽환적인 울림과 전체 사운드의 질감은 포스트 밥 안에서도 진보적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