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 런던(Julie London: 1926.09.26 – 2000.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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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키 보이스로 백인 재즈 보컬의 매력을 알린 줄리 런던

재즈 보컬 하면 우리는 흑인 여성 보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엘라 핏제랄드, 빌리 할리데이, 사라 본으로 이루어진 재즈 보컬의 3대 디바만 해도 모두 흑인이다. 여기엔 재즈가 애초 흑인 음악의 하나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 흑인 특유의 깊이와 점성(粘性)을 지닌 노래를 들을 때면 ‘아! 영혼을 울린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하고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역시 재즈 보컬은 흑인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백인 여성 보컬은 언제나 흑인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곤 한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면 재즈 내에서는 역차별이 있는 셈이다. 백인 여성 보컬이 실력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은 그녀들의 노래가 상업적인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도 편견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흑인 보컬들 또한 상업적인 측면을 절대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백인 여성 보컬의 노래를 보다 더 상업적인 것으로 보았다면 그것은 백인 여성 보컬들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었다. 백인 보컬 상당수가 노래 외에 외모가 중시되는 연기, 광고 등의 연예 활동을 했거나 이를 바탕으로 노래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어쩌면 그녀들이 재즈를 노래한 것은 당시 그것이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실제 몇 백인 보컬은 재즈와 팝을 오가며 노래하곤 했으니까?

당시 사람들은 백인 여성 보컬을 블론디(Blondie) 보컬이라 부르곤 했다. 여기에는 흑인 보컬과 차별화하려는 의도 외에 백인 여성 보컬들이 금발의 외모로 승부한다는 다소 폄하적인 의미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외모 중심의 상업적인 의도가 다분히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에 실력 있는 백인 여성 보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줄리 런던은 대중적인 성향이 강했음에도 부인할 수 없는 음악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 음악적 매력이란 감상자를 위로하는 듯한 편안한 정서에 있다. 이것은 분명 백인 보컬만의 장점이라 나는 생각하는데 특히 줄리 런던의 안개처럼 감아드는 스모키 보이스는 일체의 어지러움을 편안하게 감싸는 힘이 있다. 그녀의 노래가 상업적이었고 또 의도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쩌면 그녀의 매력을 경험했을 지도 모르겠다. 몇 해 전에 한 카드 회사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그녀가 노래한 ‘I Left My Heart In San Francesco’가 사용되면서 인기를 얻었으니까.

줄리 런던 또한 다른 백인 여성 보컬들처럼 연기와 노래를 병행했다. 여기서 노래가 우선이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할 듯싶다. 왜냐하면 배우로서 먼저 활동을 시작한데다가 70년대에 음악계를 떠난 후에도 연기 활동은 계속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녀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연기가 아닌 노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언급했지만 그녀의 전문적인 연예 활동은 연기로 시작되었다. 1944년 영화 <Nabonga>에 캐스팅 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가 큰 역할을 했다. 실제 첫 영화를 찍기 전까지 외모가 중요한 엘리베이터 걸, 핀업(Pinup) 걸로 일했었다. 탁월한 노래 실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실제 1955년 노래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녀는 노래와 관련된 배역을 얻지 못했다.

이런 그녀가 노래를 하게 된 것은 첫 남편 잭 웹과 멀어지고 1954년, 후에 두 번째 남편이 되는 바비 트룹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연기자이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그리고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단번에 줄리 런던이 노래로 성공할 수 있음을 간파했다. 그렇게 해서 싱글을 녹음한 끝에 첫 앨범 <Julie Is Her Name vo. 1>이 제작되었다. 이 앨범으로 줄리 런던은 단번에 가장 인기 있는 보컬이 되었다. 빌보드는 그 해 최고의 여성 보컬로 그녀를 선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의 인기를 가져다 준 곡은 ‘Cry Me River’였다. 그녀의 고등학교 친구이기도 한 아서 해밀튼이 쓴 이 곡은 줄리 런던의 스모키 보이스가 지닌 위안의 매력을 단번에 느끼게 해주었다. 그래서 줄리 런던은 이듬 해(1956년) 영화 < The Girl Can’t Help It>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출연하여 이 곡을 노래하기도 했다.

1955년부터 1969년까지 줄리 런던은 총 32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하면서 대표적인 백인 여성 보컬로 재즈는 물론 미국 팝 음악의 별로 자리잡았다. 물론 그 사이 연기 활동을 계속했지만 노래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32장의 앨범을 통해 그녀는 스탠더드 재즈부터 라틴 재즈 그리고 팝 음악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이들 앨범은 그녀의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사진을 표지로 사용하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백인 재즈 보컬로 성공했지만 그녀는 의외로 1969년 앨범 <Yummy Yummy Yummy>를 끝으로 앨범 활동을 그만두었다. 더 이상 섹시 심볼로서의 이미지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실제 그녀의 성격이 외모와 달리 수줍음이 많았다고 하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보컬로서의 활동을 그만 둔 이후에도 TV 시리즈 <Emergency> 등에 출연하면서 약 10년간 연기 활동을 지속한 것을 보면 그녀가 조금 더 노래를 계속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곤 한다. 이 아쉬움은 그녀가 1981년 영화 <샤키 머신>의 사운드트랙을 위해 녹음한 ‘My Funny Valentine’을 들으면 더 커진다. 그녀의 마지막 녹음이기도 했던 이 곡에서 그녀의 스모키 보이스는 여전히 편안한 아름다움을 발산했으니 말이다.

2000년, 5년간 앓아온 뇌졸증과 건강 악화로 인해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재즈 보컬은 백인 보컬이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상황을 맞았다. 흑인 보컬이 지닌 음악적인 매력은 여전하지만 감상자들이 이제 재즈를 편한 휴식을 위한 음악으로 받아들이면서 백인 보컬들의 위상이 더 커지게 된 것 같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다이아나 크롤이다. 그런데 그녀의 노래에는 줄리 런던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특히 그녀의 스모키 보이스는 대 선배의 전성기를 생각하게 한다. 상업적인 측면만 부각되었던 줄리 런던이지만 그녀 또한 자신의 개성으로 후대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대표 앨범

 Julie Is Her Name (Liberty 1955)

줄리 런던의 첫 앨범이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되는 바비 트룹에 의해 가능성을 인정 받아 녹음한 이 앨범으로 그녀는 단번에 정상의 재즈 보컬/ 팝 보컬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Cry Me A River’는 이후 그녀를 이야기할 때 배놓을 수 없는 히트 곡으로 자리 잡았다. 이 외에 ‘I Should Care’, ‘Say It Isn’t So’, ‘Gone with the Wind’ 등의 노래들이 이후 그녀를 정의하게 되는 편안하고 포근한 그녀만의 스모키 보컬이 첫 앨범에서부터 완성된 형태로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All Through the Night: Julie London Sings the Choicest of Cole Porter (Liberty 1965)

jl줄리 런던이 녹음한 32장의 앨범 가운데 가장 음악적으로 우수한 앨범을 고른다면 이 앨범이 아닐까 싶다. 콜 포터의 곡 가운데 10곡을 노래한 이 앨범은 줄리 런던의 매력적인 노래는 물론 사운드 또한 무척이나 훌륭하다. 리듬을 타며 부드럽게 움직이는 줄리 런던을 만날 수 있는 ‘I’ve Got You Under My Skin’을 비롯하여 이별의 쓸쓸함을 특유의 스모키 보이스로 부드럽게 위로해 주는 ‘Every Time We Say Good Bye’등의 곡들이 줄리 런던의 음악적 매력을 실감하게 해준다.

The Very Best Of Julie London (Capitol 2006)

사실 많은 백인 여성 재즈 보컬들은 일반 팝 보컬들과 마찬가지로 앨범 이전에 곡 단위로 활동을 많이 했다. 줄리 런던도 마찬가지. 그래서 그녀의 히트 곡들을 다 듣기 위해서는 전 앨범을 들어야 할 지경이다. 그래서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발매된 이 베스트 앨범을 추천한다. 국내에서 유난히 인기 있는 ‘Fly Me To The Moon’을 비롯하여 ‘I Left My Heart In San Francesco’, ‘Cry Me A River’ 등의 노래들이 두 장의 CD에 빼곡히 정리 되어 줄리 런던의 매력을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2 COMMENTS

  1. 좋은글 읽고 갑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그녀 특유의 허스키한 보컬을 좋아해서 재즈 보컬 트랙들은 전부 줄리 런던이었던 기억이 날 정도로 매력적인 보컬리스트 인거 같아요. 아티스트적 행보보단 상업적 팝 가수라는 느낌이 더 크긴 했지만 잔잔하게 부르는 쿨재즈 타입의 보컬은 충분히 표현하고도 남았거든요.
    덕분에 julie in her name부터 다시 앨범 들으러 당시 추억속으로 잠기러 갑니다. 고마워요!

    • 고맙습니다. 줄리 런던처럼 백인 보컬들은 다소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부담 없이 오래 듣게 되는 경우는 백인 보컬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줄리 런던은 그 중 대표적이고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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