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벗어난 푸근하고 따스한 톤으로 세상을 감쌌던 연주자
9월이다. 아직 여름이 끝났다고 볼 수는 없지만 9월이 되면 사람들은 저절로 가을을 그리고 더위를 밀어내는 바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가슴 한 쪽에 텅 빈 자리 하나를 만들고 그 곳을 오늘의 기억으로 채워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올 테고 또 그러다 보면 현재는 과거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과거가 된다는 것! 여기엔 일종의 아쉬움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 회한마저 사라지면 과거는 지난 것으로 사라지지 않고 시간성을 벗어난 영원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색소폰 연주자 벤 웹스터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가 시간의 흐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또 이를 통해 시간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그의 솔로 연주를 들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슴 가득 공기를 들이마신 공기가 그대로 색소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듯한 두툼한 이불처럼 푸근한 색소폰 음색과 마치 맛 좋은 음식의 구수한 향기처럼 공기를 타고 흐르는 멜로디는 확실히 시간을 벗어난 측면이 있다. 특히 찰리 파커를 중심으로 뜨거운 비밥이 인기를 얻었던 194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연주를 들으면 과거도, 현재도 더구나 미래도 아닌 탈시간적인 느낌을 쉽게 받게 된다. 색소폰 밖으로 공기가 살짝 새어 공간과 소리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묵직한 톤에서 여유와 안락의 정서를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러한 탈시간적 정서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1957년도 앨범 <Soulville>에서의 안개처럼 착 가라앉은 듯한 음색의 느긋한 연주는 모든 사물의 경계를 녹여버리는 듯한 신비로움마저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러한 풍성한 톤으로 연주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런 음색은 40대 이후에 완성된 것이었다. 청춘 시절 그의 색소폰 음색은 이와는 달랐다. 묵직함보다는 고음역대의 날렵함으로 스윙 시대를 경쾌하게 달렸다. 그리고 젊음의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거친 톤을 들려주었다. 이것은 1930년대 카운트 베이시와 함께 베니 모튼 밴드에서 활동했던 캔자스 시티 시절을 거쳐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서 제 1 테너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특히 1940년부터 42년까지 약 3년간의 활동이 대단했다. 이 시기의 연주는 ‘Cotton Tail’을 들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곡에서 빠른 템포 위를 뜨겁게 달리는 벤 웹스터의 연주에 열광한 사람들은 그와 함께 밴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지미 블랜튼까지 고려하여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를 웹스터-블랜튼 오케스트라로 부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절규하는 듯한 벤 웹스터의 연주는 비록 스윙 시대에 머물고 있더라도 그 열기만큼은 이후에 등장하는 비밥 시대의 열기에 견줄만한 것이었다. 아울러 콜맨 호킨스, 레스터 영과 함께 그를 색소폰의 리더로 평가하게 했다.
그런데 정작 그에게 더 어울렸을 지도 모르는 비밥 시대가 찾아오자 그는 연주의 방향을 180도 바꿔버렸다. 위에서 언급했던 풍성한 저음을 지닌 톤으로 유유자적한 연주를 즐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빠른 것, 화려한 것이 아름답다고 믿는 것 같았던 비밥 시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 방향을 바꾼 것일까? 어찌 보면 듀크 엘링턴 밴드 시절의 날렵함을 그대로 유지했어도 충분히 인기를 얻고 높은 평가를 받았을 텐데 말이다. 이 이유에 대해 나는 그가 시간의 흐름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비밥 시대가 새로운 젊은 세대-자신보다 10년 가량 어린 세대를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콜맨 호킨스가 어린 후배들과 함께 어울려 비밥을 능숙하게 연주하면서 젊음을 지속시키려 했던 것과 달리 그는 중년으로 접어든 자신의 시간을 인정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젊음의 자리를 내어 주고 그들과는 다른 그만의 것을 만들어 나가려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 그의 나이 48세에 녹음한 <Soulville> 같은 앨범을 들으면 그보다 훨씬 더 관록 있는 연주자가 녹음한 앨범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비밥 시대에 그가 들려준 느긋한 발라드 연주들은 한편으로는 시대에 역행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난 시대의 끝자락을 놓지 않은 듯한 느낌이랄까? 즉, 비밥 시대와의 대조를 통해 그의 푸근하고 풍성한 톤과 연주가 빛이 난다는 것이다. 나 또한 처음 그의 연주를 듣게 되었을 때 비밥을 기대했다. 그래서 복고적인 정서에 무척 당혹해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가 1964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정착하면서 남긴 녹음들은 이와 다르다. 단순한 복고적인 취향을 넘어 시간을 벗어난 영원성마저 느껴진다.
여기에는 그의 재즈가 미래를 향해 빠르게 흐르는 뉴욕이라는 공간을 떠났다는 것이 한 몫 한다. 실제 재즈의 첨단을 이끌던 뉴욕에 비해 유럽은 당시만 해도 그보다는 보수적인 취향을 보이고 있었다. 지난 시대의 거장들에 대해 깊은 존중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연주를 현재의 것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겼다. (그렇기에 벤 웹스터를 비롯한 많은 지난 시대의 연주자들이 유럽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렇기에 유럽에서는 재즈의 시간 경계가 다소 모호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벤 웹스터의 재즈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제작되고 있는 30년대 스윙 스타일의 빅 밴드 앨범이나 40,50년대의 모던 재즈 앨범들을 들어보기 바란다. 이들 앨범을 들으면 지난 시대를 추억하는 한편 이 추억의 음악들이 사라지지 않고 독자적인 시간 속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에도 지속될 것임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남긴 벤 웹스터의 말년 녹음들이 그렇다. 시대 착오적인 연주가 아닌가 싶기도 하면서도 그 아름다움만큼은 시대를 넘어 영원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스탄 겟츠, 아치 쉡, 스콧 해밀튼 같은 연주자들을 통해 그의 따스하고 풍성한 톤이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며 유지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시간의 흐름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흐름을 무작정 따르기만 한다면 결코 자신만의 무엇을 이루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그렇기에 여전히 시간에 얽매인 우리 삶에 아쉬워하고 좌절하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벤 웹스터의 연주는 고단한 우리에게 풍요와 여유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아울러 그만의 독특한 톤도 톤이지만 과감하게 현재를 벗어날 수 있었던 그의 결단력, 용기야 말로 그를 재즈사의 전설로 기억해야 할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대표 앨범
Never No Lament: The Blanton-Webster Band – Duke Ellington (RCA 2003)
만약 청춘 시절 벤 웹스터의 연주가 궁금하다면 듀크 엘링턴의 이름으로 발매된 이 앨범을 들어보기 바란다. 듀크 엘링턴의 다양한 활동 기간 중에 벤 웹스터가 있었던 1940년부터 1942년 사이의 연주를 모아 놓은 앨범이다. 이 시기 밴드는 벤 웹스터 지미 블랜튼에 대한 높은 인기를 반영해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가 아닌 웹스터-블랜튼 밴드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절규하는 듯한 거친 톤으로 빠르게 연주하는 벤 웹스터의 연주가 돋보이는 ‘Cotton Tail’은 필청 트랙이다.
Soulville (Verve 1957)
벤 웹스터는 특유의 저역대가 강조된 풍성하고 느긋한 색소폰 톤이 지닌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앨범이다. 여기에 오스카 피터슨을 중심으로 한 다른 연주자들과의 여유로운 호흡도 상당히 뛰어나다. 벤 웹스터의 매력을 제대로 이해한 제작자 노먼 그란츠의 지휘하게 만들어진 이 앨범에서 그는 시대와 상관 없이 영원히 지속될 안락하고 푸근한 이상적 공간을 꿈꾸게 한다. 한편 CD로 재발매 되면서 벤 웹스터 본인의 피아노 연주곡이 세곡 보너스로 실린 것도 흥미롭다.
Ben Webster Meets Oscar Peterson (Verve 1959)
벤 웹스터는 탁월한 솔로 연주자였음에도 콜맨 호킨스, 제리 멀리건, 해리 스윗 에디슨, 조 자비눌(!)까지 다양한 연주자들과의 녹음을 즐겼다. 그 가운데 오스카 피터슨과의 관계는 매우 각별했다. 처음에는 Verve 레이블의 하우스 피아노 연주자와 인기 스타 연주자의 만남으로 시작된 것이었지만 이 관계는 1953년을 시작으로 10여 년간 지속되었다. 그 가운데 이 앨범은 뛰어난 조력자 오스카 피터슨과 그 안에서 자유로이 빛나는 벤 웹스터의 관계를 가장 잘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