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을 돌아보며 새로운 최고의 시절을 꿈꾸다
바쁜 삶일수록, 아니면 매일매일 비슷하게 이어지는 삶일수록 자신의 과거와 반추(反芻)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평가 받는 삶일지라도 정작 자신은 그 삶을 후회할 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삶이 흘렀고 그만큼 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괴로워할 것이다. 아니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삶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 미래를 기획하고 이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이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실천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뻔한 후회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로라 피지는 평범한 우리와 달리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 보고 여기서 새로운 삶의 의욕을 충전하는 시간을 도모했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 <The Best Is Yet To Come>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이 네덜란드 출신의 보컬은 이 앨범에서 자신의 지난 20년을 되돌아 보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시작을 다짐한다.
로라 피지는 외모를 내세우는 팝 성향의 걸 그룹 센터폴드의 멤버로 활동하다가 1991년 앨범 <Introducing>을 발표하며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재즈 하모니카의 거장 투스 틸먼스와 기타 연주자 필립 캐서린의 지원 속에 노래한 이 첫 앨범은 기대 이상의 커다란 성공을 거두며 로라 피지가 이후 재즈 보컬로서의 삶을 이어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실제 이후 20년간 로라 피지는 미국에서는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유럽과 아시아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며 성공적인 활동을 계속해 왔다. 국내에서도 1994년도 앨범 <The Lady Wants To Know>가 소개되면서 지금까지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벌써 로라 피지가 활동한지 20년이 되었던가? 하며 놀라는 감상자들은 재즈 보컬로서 그녀가 특별한 변화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The Lady Wants To Know’의 주인인 마이클 프랭스와 함께 부드러운 보사노바 풍의 노래를 하기도 했고 영화 음악의 거장 미셀 르그랑과 함께 거장의 영화 주제곡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태생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우루과이에서 8년을 살았던 것을 기억하기라도 하는 듯 라틴 곡들을 노래하기도 했다. 또한 네덜란드와 일본의 수교 40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에 서기도 했으며 네덜란드인 최초로 런던에 위치한 유명 재즈 클럽인 ‘로니 스콧’에서 노래하기도 했다. 그리고 싱가포르에서는 뮤지컬 <Victor/Victoria>의 주연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니 어찌 그녀가 밋밋한 음악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녀의 지난 20년은 자신의 매력, 그러니까 줄리 런던이나 페기 리 등의 선배 백인 여성 보컬을 연상시키는 부드럽고 편안한 음색과 창법은 유지하면서 새로운 음악적 환경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성공을 지속시킬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해준다. 실제 그녀는 ‘저는 언제나 새로운 무엇을 찾아왔어요. 왜냐하면 자기 반복을 하면 안 된다 생각하기 때문이죠. 저는 판에 박힌 것이 싫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번 새 앨범도 마찬가지다. 앨범에서 로라 피지는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먼저 그녀는 추억의 순간을 기록한 사진과 짧은 소개 글을 통해 자신의 20년을 정리 했다. 그리고 그녀의 영원한 음악 동지 얀 메누, 요한 플롱프가 이끄는 웅장한 빅 밴드를 배경으로 노래했다. 뜻밖에도 빅 밴드와 함께 하는 것은 그녀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빅 밴드와 함께 공연을 했을 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빅 밴드를 배경으로 노래하는 것이 새로움의 전부일까? 내용과 형식이 상보(相補)적인 관계를 지니듯 빅 밴드의 기용에 맞추어 그녀는 레퍼토리를 색다르게 구성했다. 타이틀 곡 ‘The Best Is Yet To Come’을 시작으로 ‘Smile’, ‘I’ve Got A Crush On You’, ‘Fever’, ‘It’s Easy To Remember’, ‘You & The Night & The Music’, ‘The Good Life’등의 스탠더드 곡들을 노래했는데 사실 이 곡들은 워낙 유명하고 그만큼 널리 노래되었던 곡이기에 그 자체로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스탠더드 곡들 가운데 이들 곡을 선택했던 것인 프랑크 시나트라, 토니 베넷, 줄리 런던이 애창하던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재즈 보컬, 특히 편안하고 부드러운 재즈 보컬의 대명사이자 빅 밴드를 배경으로 노래하기를 즐겼던 보컬들이다. 그렇기에 로라 피지가 처음으로 빅 밴드를 배경으로 노래하면서 이들 곡들을 선택한 것이라 생각된다.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선배 보컬들의 애청곡을 노래하기로 하면서 이에 걸맞은 빅 밴드를 기용하게 된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로라 피지가 선배 보컬의 그림자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선배를 의식했구나 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특히‘Smile’, ‘Fever’, ‘The Good Life’등에서는 줄리 런던이 절로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재즈 보컬의 역사 속에 놓였기 때문에 겪게 되는 극히 부분적인 것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이 20년 차 재즈 보컬이 선배의 영향을 자기화하여 만든 매력에 있다. 그 매력은 다름 아닌 강약과 음색을 다양하게 조절하는 중에도 변하지 않는 그녀만의 편안함이다. 실제 빅 밴드의 극적인 흐름에 맞추어 로라 피지는 미묘한 톤과 음색의 조절로 곡 마다 새로운 활력을 부여한다. 그래서 ‘Too Darn Hot’에서는 육감적이었던 그녀의 노래는 ‘Fever’에서 뜨겁게 상승했다가‘That Old Black Magic’에서 속삭이는 듯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그녀만의 편안함과 부드러움은 그대로이다. 상승의 순간에도 힘을 그리 들이지 않는 듯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감상자를 일체의 불안, 어지러움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이 낙관적이고 낭만적인 세계로 이끈다.
한편 빅 밴드를 배경으로 한 그녀의 노래들은 최근 몇 년간 이어진 재즈 보컬로서의 정통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한 그녀의 노력의 완결을 의미한다고 본다. 사실 다양한 스타일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노래는 재즈이면서도 팝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여기에는 재즈를 노래하기 이전의 걸 그룹 활동이 선입견으로 작용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 또한 이를 의식했던 것일까? 지난 2003년도 앨범 <At The Ronnie Scott’s> 부터 그녀는 보다 정통적인 스타일로 노래해왔다. 그래서 기존 그녀의 노래에 비해 살짝 무거운 느낌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앨범은 정통적이면서도 그녀만의 부드러운 매력이 잘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최근 10년 사이에 그녀가 선보인 앨범들 가운데 음악성과 대중성이 가장 잘 어우러진 앨범이라 할만 하다.
이렇게 지난 20년을 돌아보면서도 로라 피지는 새로운 출발을 시도했다. 그녀가 이렇게 또 다른 시작을 다짐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20년의 삶이 성공적이었음에도 아직 최고의 시기는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앨범 타이틀‘The Best Is Yet To Come’이 이를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앨범 이후에 펼쳐질 그녀의 새로운 음악 인생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56세지만 여전히 음악적으로는 젊은 그녀의 삶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