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영화 속 여인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는 앨범
찰리 헤이든은 많은 재즈 연주자들 가운데 새로운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연주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본격적으로 그가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만 해도 프리 재즈 연주자 오넷 콜맨의 쿼텟에서 베이스 연주를 하면서부터였다. 그 뒤로 그는 역시 진보적인 성향의 키스 자렛의 아메리칸 쿼텟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고 얀 가바렉, 에그베르토 기스몬티 등과 함께 하는 등 늘 앞을 바라보는 활동을 했다. 또한 첫 리더 활동으로 재즈에 월드 뮤직, 포크적인 요소를 가미한 리버레이션 뮤직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만 보더라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재즈를 앞으로 전진시키는 일에 매진한 연주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된다. 찰리 헤이든도 마찬가지였다. 50세를 앞둔 1986년에 결성한 쿼텟 웨스트가 그랬다. 찰리 헤이든은 10대 시절을 추억하기 위해 쿼텟 웨스트를 결성했다. 그냥 쿼텟이 아니라 쿼텟 웨스트로 그룹 이름을 정한 것은 이 그룹이 1940,5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감수성을 재현하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찰리 헤이든이 유년 시절 할리우드 영화에서 많은 감성적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10살 무렵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보았던 영화 <The Big Sleep>을 그는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1993년에 선보인 쿼텟 웨스트의 앨범 <Always & Goodbye>에서 찰리 헤이든은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한 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타이틀을 그대로 앨범의 앞뒤에 장식함으로써 이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앨범 외에도 그는 쿼텟 웨스트의 앨범마다 1940,5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낭만을 훌륭하게 그리며 이를 통해 자신의 유년 시절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왔다. (기타 연주자 팻 메시니와 듀오로 녹음한 1996년도 앨범 <Beyond The Missouri Sky>는 이와는 다른 차원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 앨범이었다.)
재즈의 황금기였던 1940년대와 50년대를 그리는 쿼텟 웨스트의 음악은 음악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1999년에 선보였던 <The Art Of The Song>이후 더 이상 새로운 쿼텟 웨스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나 또한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쿼텟 웨스트의 음악을 들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11년 만에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추억 상자를 뒤져서 새로운 앨범을 만들어 냈다. 추억은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무궁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그가 소중한 추억으로 빚어낸 앨범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비록 드럼 연주자가 로렌스 매러블에서 로드니 그린으로 바뀌는 변화가 있지만 음악은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채도와 명도를 살짝 낮춘 듯한, 그래서 과거의 연주를 듣는 듯한 어니 와츠의 색소폰, 차분하고 섬세한 음색으로 고운 멜로디를 만들어 내는 앨런 브로드벤트의 피아노, 음 하나로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 내는 묵직한 찰리 헤이든의 베이스, 그리고 쿼텟의 연주에 할리우드적 공간감을 부여하는 풍성한 스트링 오케스트라가 어울려 만들어낸 사운드가 감상자를 비현실적인 줄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오래된 고전 영화의 낭만 속으로 다시 한번 초대한다.
이번 앨범에서 찰리 헤이든과 쿼텟 웨스트 멤버들이 그리고 있는 영화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다. 이것은 이미 표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과거 영화 포스터들이 사진보다는 영화 주인공이나 한 장면에 대한 그림을 사용했던 것처럼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 역시 이제는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여인의 정면 모습을 표지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고전적인 서체로 ‘Sophisticated Ladies’라 적혀 있다. Sophisticated Ladies, 듀크 엘링턴이 1933년에 작곡한 ‘Sophisticated Lady’에서 영감을 얻었음이 분명한 이 앨범의 타이틀은 우리 말로 하면 세가지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지적인 여인들’, ‘세련된 여인들’, ‘까다로운 여인들’로 말이다. 이 가운데 꼭 어느 것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어찌 보면 중의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다. 찰리 헤이든이 좋아한 영화 <The Big Sleep>에서 탐정 필립 말로우(험프리 보가트)와 사랑에 빠지는 여인 비비안 루트리지(로렌 바콜)가 세련된 외모에 지적이며 그만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까다로운 여인, 지금도 쉽게 만나기 힘든 여인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번 새 앨범에서 쿼텟 웨스트가 그리는 여인상은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전형적 여인상이자 이상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여인의 이미지를 간결히 표현하기 힘들었는지 찰리 헤이든은 이번 앨범을 위해 무려 6명의 여성 보컬을 초대했다. 최근 주목 받고 있는 멜로디 가르도를 필두로 담백하게 노래하는 노라 존스, 건조한 중저음이 매력인 카산드라 윌슨, 현 백인 여성 보컬의 대명사 다이아나 크롤, 찰리 헤이든의 아내인 루스 캐머룬 등의 재즈 보컬들과 클래식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이 그의 초대장을 받은 인물들. 이 여섯 명의 여성 보컬들은 자기만의 개성으로 주어진 곡을 노래하여 ‘Sophisticated Lady’의 복잡다면적인 이미지를 상상하게 해준다. 그래서일까? 그녀들의 노래는 쿼텟 웨스트의 전형적인 사운드 안에 위치하면서도 평소 그녀들이 자신의 앨범에서 들려주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멜로디 가르도가 특유의 비브라토로 노래한 앨범의 첫 곡 ‘If I’m Lucky’는 그녀의 지난 앨범 <My One & Only Thrill>의 수록곡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노라 존스가 노래한 ‘I’ll Wind’도 마찬가지. 노라 존스의 담백, 담담한 창법이 첫 앨범 <Come Away With Me>시절처럼 외로움을 위로한다. 게다가 이 곡에서 찰리 헤이든은 오케스트라를 쉬게 했는데 이 또한 노라 존스의 개성을 의식한 결과라 생각된다. 이별마저 감미롭게 만드는 다이아나 크롤의 스모키 보이스가 돋보이는‘Goodbye’도 그렇다. 평소 그녀의 이미지가 곡에 잘 투영되어 있다. 이 외에 루스 캐머룬이 노래한 ‘Let’s Call It A Day’ 또한 쿼텟 웨스트와 그녀의 편안한 감성이 잘 어우러져 있다. 반면‘My Love & I’를 노래한 카산드라 윌슨은 이전과는 다소 다른 신선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가 곡에 부여한 표현한 허무와 그 극복의 의지는 평소 그녀의 노래에서 종봉 발견되는 것이지만 오케스트라가 궤를 맞춘 경우는 흔치 않았기에 그 자체로 새롭다. 그리고 이렇게 풍성한 사운드를 배경으로 그녀만의 음악을 더 만들면 어떨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
한편 이번 앨범은 여성 보컬들의 노래 사이사이에 쿼텟 웨스트의 연주를 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겉으로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보컬 곡과 이어지는 연주곡이 하나의 짝을 이루어 보다 극적인 정서를 유발한다. 예를 들면 카산드라 윌슨이 노래한 ‘My Love & I’가 앨범에서 가장 감동적인 멜로디와 보컬의 조화를 선보이고 나면 어니 와츠의 색소폰이 마치 어두운 분위기의 흑백 영화-개인적으로 할리우드 영화는 아니지만 로만 폴란스키의 50,60년대 영화가 떠올랐다-를 연상시키는 ‘Theme From Markham’이 이어진다. (참고로 Markham은 캐나다의 한 도시 이름이다.) 멜로디 가르도의 노래와 이어지는 ‘Sophisticated Lady’의 조합도 상당히 낭만적이다. 따라서 다양한 여성 보컬들이 앨범에 참여했다고 해서 그녀들의 노래, 그녀들이 참가한 곡에만 관심을 보이지 말자.
쿼텟 웨스트만의 연주를 두고 말한다면 평소처럼 느와르적인 정서를 반영한 연주 외에 ‘Today I Am A Mna’이나 ‘Wahoo’처럼 보다 정통적인 비밥 사운드를 추구한 것이 흥미롭다. 그래서 공간감이 할리우드에서 뉴욕으로 건너왔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앨범 전체의 정서적 일관성이 흔들린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비틈은 앨범에 역동적인 흐름을 부여하며 감상을 보다 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찰리 헤이든 쿼텟 웨스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말 1940,50년대가 그리 낭만적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실제 <Always & Goodbye>앨범을 듣고서는 앨범이 화두로 삼은 영화 <The Big Sleep>이 궁금해 영화를 직접 보기도 했다. 그러나 앨범만큼 낭만적이지 않아서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그래서 들었던 생각은 추억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낭만적으로 비추어졌겠다 것이었다. 아마도 그 추억은 시간이 더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더 낭만적이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순간 뒤돌아 자신의 지나온 삶을 바라보게 된다. 그 때 이렇게 찰리 헤이든의 음악처럼 그 삶이 아름답게 보일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쿼텟 웨스트의 음악을 들었던 그 순간만큼은 아름다운 추억의 순간으로 기억될 것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