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Letters – Beegie Adair (Spring Hill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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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의 가슴엔

아무도 모르는

외로운 섬 하나가 있다

어느 시인의 말이다. 시의 전문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구절에 매우 공감한다. 매일 비슷하게 재미 없는 일들이 반복되는 하루. 옆에 있는 사람과도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 않는 건조한 삶을 살다 보면 사람들은 가슴 한 구석에 나만의 공간을 꿈꾸게 된다. 그 공간을 생각하며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을 견디는 것이다. 그런 것이 없다면 그는 이 도시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거나 자신을 이미 잊어버린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가슴 속 그리는 공간이 저 멀리 남쪽에 있는 이국적 풍경의 진짜 섬일 필요는 없다. 그저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하고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섬이 될 수 있다. 음악이 좋은 예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그 음악이 이끄는 대로 낯선 공간을 꿈꾸고 이를 통해 삶의 새로운 활력을 얻곤 한다. 나 같은 경우만 해도 오늘 어둠을 달리는 혼잡한 지하철에서 피아노 트리오 연주를 들으며 안락한 나만의 공간을 꿈꾸었다.

오늘 내가 지하철에서 들었던 음악은 바로 비기 어데어의 연주였다. 정말 이 노장 피아노 연주자의 연주는 복잡한 현실을 떠나 모든 것이 부드럽고 달콤한 공간, 일체의 불안이 없는 행복한 공간을 그리게 만든다. 현실과 유사하면서도 사실은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을 그리는 비현실 같은 연주라고나 할까?

나는 비기 어데어의 음악이 이렇게 현실의 괴로움을 잊게 할 정도로 달콤한 공간을 그리게 된 데에는 그녀 또한 음악이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섬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1937년생의 이 여성 피아노 연주자의 음악적 삶은 적어도 1991년 그러니까 55세의 나이에 첫 앨범 <Escape To New York>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재즈를 추구하면서도 컨트리 음악의 중심지 내쉬빌을 활동 무대로 삼은 것부터가 그녀가 자신이 하고픈 음악만 고집할 수 없는 삶을 살았을 것임을 유추하게 한다. 실제 그녀는 재즈 외에도 다양한 스타일의 연주활동을 했으며 나아가 광고, 라디오, 영화 등 상업적인 성격이 강한 음악을 요구하는 분야에서 활동했다. 여기에는 생계라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은퇴를 준비해야 할 55세가 되어서야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잡았을 것이고. 게다가 자신의 음악으로 인정을 받게 되기까지는 6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처럼 겉으로는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한다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음악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 또한 현실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그녀의 생각과는 다른 연주를 요구했을 지라도 그녀는 결국 자신이 위로를 받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섬은 음악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며 참을성 있게 현실을 견뎠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현실의 독(䓯)을 빼고 이렇게 낭만적인 연주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 <Love Letters>는 ‘The Beegie Adair Romance Collection’이라는 부제가 의미하듯 그동안 비기 어데어가 발표했던 많은 앨범들 가운데 15장의 앨범에서 고른 달콤하고 낭만적인 30곡을 두 장의 CD에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장의 CD는 비기 어데어의 트리오 연주와 여기에 다른 연주자가 가세한 연주를 분리하여 싣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그녀의 연주가 달콤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도 사랑의 편지처럼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한 연주만을 고른 듯하다. 그 결과 타이틀 곡 ‘Love Letter’를 시작으로 ‘So In Love’, ‘In A Sentimental Mood’, ‘All The Things You Are’, ‘Tea For Two’, ‘Always On My Mind’, ‘I’ll Be Seeing You’같은 곡들이 선곡되었다.

이들 곡들을 비기 어데어는 이미 언급한대로 ‘낭만적인 너무나 낭만적인’ 방식으로 연주한다. 로저 스펜서의 간결한 베이스와 가볍고 온화하게 흔들리는 크리스 브라운의 드럼을 배경으로 흐르는 그녀의 연주는 달콤한 칵테일 한 잔을 걸치고 나지막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이 가벼이 담소를 나누는 카페나 바의 뒤쪽에 흐르는 음악처럼, 앨범에 담긴 곡들은 멜로디도 곱긴 하지만 멜로디 하나가 아니라 여기에 화성과 리듬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사운드의 달콤한 분위기로 감상자를 감싼다.

비기 어데어식 달콤함은 이별을 이야기하는 곡에서도 예외를 보이지 않는다. ‘Every Time We Say Good Bye’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주로 이별이 주는 쓸쓸함에 맞추어 연주되고 노래되곤 했던 이 곡마저 비기 어데어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기로 마음 먹은 듯 낭만을 담뿍 넣어 연주한다. 트리오 외에 다른 연주자와 함께 한 곡에서도 마찬가지다. 앨범의 두 번째 CD는 제이미 폴(보컬), 데이비드 데이비슨(바이올린), 잭 제즈로(기타), 데니스 솔레(색소폰), 제프 테일러(아코데온) 등의 연주자와 함께 한 곡들을 담고 있는데 이들 곡에서도 역시 그녀만의 낭만이 그래도 전해온다. ‘I Wish You Love’같은 곡을 예로 들면 데이비드 데이비슨의 바이올린 연주가 원곡의 슬픔을 그대로 반영하는가 싶더니 이내 비기 어데어 특유의 달콤한 연주가 슬픔을 지워버린다.

한편 비기 어데어가 달콤한 연주로 일관한다고 해서 그녀가 분위기의 연출에 연주를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사실 얼핏 보면 그녀의 연주는 무척이나 쉽게 보인다. 그냥 적당히 리듬을 타고 멜로디에서 멀리 덜어지지 않으며 연주하기만 하면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연주가 달콤하게 다가오는 것은 우아하고 섬세한 터치와 부드럽게 리듬을 타고 그 속도를 조절하는 능력 때문이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쉬운 연주로 들릴 뿐이다.

그러고 보면 결국 비기 어데어의 연주는 현실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게 하는 음악이 아니라 답답한 현실을 나만을 위한 편안하고 달콤한 섬으로 바꾸는 음악일 지도 모르겠다. 실제 오늘 내가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이 앨범을 들으며 낭만을 느꼈던 것처럼 당신 또한 비기 어데어의 음악을 듣는 순간 잠시나마 당신이 있는 곳이 낭만적으로 느껴지리라 생각한다. 마치 행복한 사랑의 편지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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