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엑달의 첫 번째 라이브 앨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1년 여름 나는 리사 엑달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파리 교외인 뱅센느에 위치한 ‘꽃 향기 공원(Parc Floral)’의 야외 무대에서의 공연이었다. 그날 하늘은 무척이나 파랬고 공원의 꽃과 나무들은 파리의 여름은 그 자체로 축제와도 같은 것이라 말하는 듯 눈부실 정도로 화사했다. 그런데 리사 엑달은 이러한 푸른 하늘과 화려한 꽃보다 더욱 빛났다. 꽃 무늬 원피스를 입고 가벼이 몸을 흔들며 당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던 앨범 <Sings Salvador Poe>의 보사노바 곡들을 노래하는데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여신’이었다.
귀여운 목소리로 한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에 객석은 물론 근처 잔디 밭에서 편안하게 공연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했다. 그녀의 노래는 음악을 넘어 꽃 공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완성하는 행복이었다. 아! 물론 리사 엑달 또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보사노바 작곡가 살바도르 포와 신혼의 달콤함에 빠져 있었을 때이니 이런 행복감은 당연했을 법하다. 그러나 그날 그녀에 대한 관객들의 환호는 그녀를 더욱 행복하게 했다. 많은 관객이 끊임없는 박수로 앙코르에 앙코르를 연발했던 것이다.
이러한 객석의 환호성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사실 프랑스는 리사 엑달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보컬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웨덴 출신인 그녀는 1994년 자신의 이름을 건 앨범 <Lisa Ekdahl>을 발표하자마자 단번에 스웨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것은 세 번째 앨범 <Bortom Det Blå>(1997)까지 이어졌다. 이 성공에 힘입어 그녀는 새로운 도약을 꿈꾸었는데 그것은 바로 영어로 노래한 앨범을 녹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녀가 선택한 영어 노래는 스탠더드 재즈 곡이었다. 재즈 피아노 연주자 피터 노르달이 큰 도움을 주긴 했지만 스웨덴의 전통적 정서가 느껴지는 담백한 포크적인 사운드를 뒤로 하고 재즈를 노래한다는 것은 분명 큰 모험이었다. 특히 덜 성숙된듯한 가냘픈 그녀의 목소리와 성량은 재즈 하면 떠오르는 무게 있는 흑인 여성의 것과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기에 그 모험은 다소 무모해 보였다.
실제 그녀의 첫 번째 재즈 앨범 <When Did You Leave Heaven>(1997)을 두고 유럽과 미국의 평단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팝 가수의 외도 정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프랑스도 마찬가지. 그러나 일반 감상자들의 반응은 정 반대였다. 파리 생 제르맹에 있는 작은 클럽 ‘라 빌라’에서의 첫 공연부터 프랑스 감상자들은 그녀의 노래에 빠졌다. 그들에게 어린 아이 같은 그녀의 목소리는 성숙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귀여움이 돋보이는 목소리였으며 가벼운 사운드는 소녀적 발랄함의 표현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 그녀는 ‘언제 천국을 떠났는지 묻고 싶은(When Did You Leave Heaven)’ 천사와도 같은 대접을 받았다. 이것은 이듬해 발매된 <Back To Earth>로 이어졌다. 그리고 2000년 가을에 발매되어 골드 레코드를 기록한 <Sings Salvador Poe>는 그녀가 프랑스가 사랑하는 재즈 보컬로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음을 확인하게 하는 증표였다.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만큼 그녀는 프랑스의 곳곳을 다니며 공연을 펼쳤다. 내가 보았던 ‘꽃 향기 공원’에서의 파리 재즈 페스티벌이나 니스 재즈 페스티벌 같은 대형 무대를 비롯하여 여러 크고 작은 클럽 공연, 대형 공연장에서의 단독 공연 등 다양한 형태의 공연으로 프랑스 감상자들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많은 공연과 인기에도 정작 그녀의 라이브 앨범이 그동안 한 장도 발매되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의아한 일이다. 만약 프랑스에서의 행복이 절정에 이르렀던 2001년경에 라이브 앨범을 발매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재즈 보컬로서 그녀의 활동은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그녀는 살바도르 포와 이혼을 했고,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와 모국어로 노래했다. 그리고 소녀에서 한 아이를 기르는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재즈를 노래하며 해외를 누비는 리사 엑달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지 않나 생각했다. 그러나 새로운 마음을 먹었는지 2009년 자신의 현재를 포크적 감성으로 담담하게 노래한 앨범 <Give Me That Slow Knowing Smile>을 영어로 노래하더니 이렇게 첫 번째 라이브 앨범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것도 그녀를 사랑하는 프랑스에서의 공연을 담은 앨범을.
이번 라이브 앨범은 지난 2010년 4월 파리에 위치한 올림피아 극장에서의 공연을 담고 있다. 이 올림피아 극장은 유서 깊은 공연장으로 프랑스 샹송의 대명사인 에디트 피아프를 비롯하여 주디 갈란드, 니나 사이먼, 폴 매카트니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유명 음악인의 공연이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리사 엑달은 올림피아 극장에서의 공연이 역사의 한 순간으로 들어가는 듯한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공연 전에 다른 어느 때보다 많은 준비를 했던 모양이다. 실제 앨범 <Give Me That Slow Knowing Smile>과 여러 스탠더드 재즈 곡을 노래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공연은 올림피아 극장, 그리고 파리라는 공간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분명 프랑스가 아닌 다른 국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공연을 펼쳤을 텐데도 말이다.
이것은 첫 곡으로 ‘April In Paris’를 선택한 것에서부터 감지된다. 공연이 2010년 4월, 파리에서 있었으니 여러 스탠더드 재즈 곡 가운데 이 곡을 첫 곡으로 노래한 것은 어쩌면 적절한 팬 서비스 정도로 생각될 지 모른다. 그러나 오르간이 만들어 내는 복고적인 공간감과 피아노가 가벼이 보컬을 담백하게 장식하는 곡의 흐름이 프랑스 샹송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그녀가 프랑스의 봄이라는 시공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이어지는 ‘Nature Boy’도 마찬가지다. 많은 재즈 연주자들과 보컬들이 슬프게 연주하고 노래했던 예를 따르면서도 그녀는 여기에 프랑스 집시 음악의 신파적 감성을 결합하여 노래한다. 이어지는‘I’ll Get A Quick Out Of You’도 역시 2박자의 기타 연주가 프랑스의 집시 재즈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공연이 프랑스 관객을 위해 여러모로 고려되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한편 ‘Now Or Never’나 ‘Love For Sale’같은 곡에서의 애교 섞인 노래는 발랄했던 1990년대 후반의 리사 엑달을 추억하게 한다.
새로운 편곡은 스탠더드 재즈 곡들이 자칫 이질적인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었던 앨범 <Give Me That Slow Knowing Smile>의 포크적인 노래들과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낳는다. 담백한 포크와 록의 정서가 강한 ‘Laziest Girl In Town’이 좋은 예이다. <Give Me That Slow Knowing Smile>의 수록곡 유쾌하고 낙관적인‘Beautiful Boy’와 우수와 관조가 어우러진‘Give Me That Slow Knowing Smile’사이에 노래된 이 곡을 과연 누가 콜 포터의 곡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외에도 리사 엑달은‘Don’t Stop’, ‘I’ll Be Around’등 <Give Me That Slow Knowing Smile>의 수록곡을 더 노래했다. (물론 실제 공연은 이 앨범보다 더 길었을 것이고 그만큼 자작곡의 비중이 더 컸을 지도 모른다.) 확실히 자작곡을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은 재즈를 노래할 때와 많은 차이가 있다. 목소리는 여전히 앳되고 귀엽지만 어느새 불혹(不惑)의 나이가 되어 세상의 시선 변화와 상관 없이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하는 그녀의 현재를 느끼게 해준다.
빛나는 청춘의 향기가 더 강한 재즈곡들과 성숙한 현재를 담은 자작곡들의 차이는 올림피아 극장에 모인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재즈를 노래할 때는 리듬을 따라 박수를 치며 곡과 동화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Love For Sale’에서의 유쾌한 박수를 들어보라.) 자작곡에 대해서는 리사 엑달의 성숙한 현재를 이해하고 긍정한다는 듯 차분한 박수로 호응한다.
이번 공연을 그녀는 단 세 명의 연주자와 함께 했다. 앨범 <Give Me That Slow Knowing Smile>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마티아스 브롬달을 중심으로 토마스 할론스텐, 조세프 자크리슨이 함께 했는데 실제 앨범의 사운드는 세 명이 만들어 낸 것이라 믿기 어려운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피아노, 오르간, 트럼펫, 기타, 베이스, 타악기 등이 곡에 따라 자유로이 어울리는 것이다. 이것은 세 연주자 모두 다중 악기 연주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각 곡들은 기본적으로 트리오의 담백함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변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 게다가 ‘Beautiful Boy’같은 곡에서는 리사 엑달의 노래에 코러스를 넣기도 하는데 그 분위기가 상당히 유쾌해서 감상을 더 즐겁게 한다.
한편 이번 앨범은 DVD와 함께 발매되었다. DVD에는 이번 올림피아 극장 공연의 일부와 스톡홀름에 위치한 리사 엑달의 집에서의 리허설, 그녀의 오랜 친구로 스웨덴의 인기 연기자 리카르드 볼프와의 가벼운 대화 등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겨 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일상 공개하는 것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올림피아 극장 공연이 그녀에게 의미가 있었다는 뜻이리라. 아무튼 아담 닐슨 감독이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 영상은 라이브 앨범의 보너스가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감상 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Daybreak’같은 보사노바 곡을 집에서 여러 연주자들과 연습하는 장면이나 혼자 파리 화보를 보면서 기타로 노래하는 장면 등은 리사 엑달을 더욱 친근하게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나아가 기왕이면 그녀의 공연을 한국에서도 볼 수 있기를 바라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