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able – Tigran Hamasyan (Universal 2011)

자신의 유년시절에 바탕을 둔 우화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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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도 어른 이상의 실력을 보이는 아이를 우리는 신동이라 부른다. 재즈에서도 지금까지 여러 신동들이 있어왔다. 실제 이 신동들의 연주를 듣다 보면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것이 있긴 하구나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그런데 누구의 잘못인지는 모르지만 이들 신동들은 대부분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서 특별한 능력을 잃곤 한다. 어린 나이에 보여주었던 놀라운 연주력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 채 정체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으로서는 평범하게 보일 수 있는 실력을 조금 일찍 선보여서 잠시 관심을 받은 정도로 치부되고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지곤 한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 <A Fable>의 주인공 티그란 하마시안은 이런 면에 있어서는 기존 신동의 이미지를 넘어선 특별함을 보여주는 음악적 신동의 삶을 살아 왔다. 1987년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장난감보다 피아노를 먼저 알았을 정도로 이른 나이에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7살이 되었을 무렵 재즈를 좋아하게 되고 이미 즉흥 연주를 즐기게 되었다. 또한 11세에는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한에서 열린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서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재능을 이른 나이에 발화하는 대신 차분하게 시간을 두고 연습과 공부를 통해 재능을 실력으로 바꿔나갔다. (여기에는 조급하지 않았던 그의 부모의 현명한 지원도 한몫 했다.)

그는 10살 무렵부터 클래식 피아노 수업을 시작했으며 그와 동시에 듀크 엘링턴, 버드 파웰, 텔로니어스 몽크 등의 재즈 명인들의 음악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또한 화려한 연주력과 함께 작곡 능력을 향상하는데 노력했다. 그리고 자신의 조국 아르메니아의 민속 음악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으로 공부했다. 음악을 공부하면서 그는 세계의 유수 재즈 피아노 경연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2002년 파리에서 열리는 마르시알 솔랄 재즈 피아노 콩쿠르에서 3위에 오르고, 이듬해 프랑스 주앙 르 팽에서 열리는 신인 재즈 경연에서는 우승을 했다. 또한 스위스 몽트뢰에서 열린 재즈 피아노 솔로 경연에서는 우승과 함께 인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우승 행렬은 2005년 모스크바와 모나코에서의 재즈 피아노 경연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2006년 19세의 나이로 몽크 재즈 피아노 콩쿨에서 우승하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세계 유수 콩쿨에서 우승하는 사이 그는 허비 행콕, 웨인 쇼터, 존 맥러플린, 조 자비눌 등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각종 콩쿨에서 우승하여 음악적 실력을 인정받고 나서야 그는 자신을 처음 인정해준 프랑스를 중심으로 앨범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앨범들은 모두 서커스적인 기예에 집중하는 일반적인 신동의 연주와는 다른 음악, 그러니까 연주만큼 깊이 있는 음악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음악을 담고 있었다. 첫 앨범을 녹음할 무렵이 19세였으니 신동이라 불릴 나이는 아니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첫 앨범부터 그의 음악은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티그란 하마시안의 네 번째 앨범 <A Fable>이 피아노 솔로 앨범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사실 솔로 연주는 연주자의 음악적 깊이가 가장 가감 없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부담이 따른다. 특히 독창적인 상상력이 없으면 시대착오적인 뻔한 연주로 남을 확률이 크다. 하지만 또 그렇기에 연주자들에게는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티그란 하마시안은 훌륭한 앨범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연주자체의 뛰어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앨범에서 그는‘우화’라는 타이틀이 의미하듯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상상력으로 가득한 그의 내면적 세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타이틀 곡 외에 다른 곡들의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세계는 환상적이고(Illusion), 삶이 윤회하며(Samsara), 매일 축제가 열리는(Carnaval) 세상이다. 그리고 달의 전설(The Legend Of The Moon)과 백설공주의 사랑(Someday My Prince Will Come)이 유효하며 꿈이 추억이 되는(A Memory That Became A Dream) 세상이기도 하다. 또한 어머니가 부재하여 그리움으로 가득한(Mother Where Are You, Longing) 세상이다.

이 젊은 피아노 연주자가 우화적 상상력을 펼치게 된 것에는 조국 아르메니아의 문학과 민속 음악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Kakavik (The Little Partridge)’이 아르메니아의 민속 음악을 바탕으로 한 곡이고 ‘Mother Where Are You’는 아르메니아의 중세 성가라는 것, 그리고 ‘The Spinners’는 키스 자렛이나 바실리스 자브로풀로스 같은 재즈 피아노 연주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주하기도 했던 신비주의자이자 작곡가인 구르지예프-그는 그리스인 아버지와 아르메니아인 어머니를 두고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났다-의 곡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또한 ‘The Legend Of The Moon’은 아르메니아 시인 게그함 사르얀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타이틀 곡 ‘A Fable’은 아르메니아의 중세 우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나아가 ‘Longing’에서는 아르메니아 시인 호바네스 투마니안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르메니아 인들을 주제로 한 시를 아예 시를 가사로 사용하여 직접 나지막이 노래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어떻게 해서 그는 조국 아르메니아를 바탕으로 한 피아노 솔로 앨범을 녹음하게 된 것일까? 여기엔 16세에 아르메니아를 떠나 뉴욕에 살게 되면서 겪었을 정체성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와 함께 그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아르메니아를 떠나기 전의 추억이 큰 힘을 발휘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앨범에서 그가 바탕에 둔 문학이나 음악들은 조국을 그리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차용한 것이 아니라 음악을 떠나 어릴 적부터 관심을 갖고 좋아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르메니아 우화를 좋아했으며 게그함 사르얀의 시를 좋아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앨범은 무엇보다 티그란 하마시안이라는 한 피아노 연주자의 내면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르메니아를 바탕으로 한 연주라고 해서 이 앨범이 일종의 민속 음악적인 면이 강하다거나 소화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연주를 담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운드의 정경은 분명 색다르지만 그 풍경이 주는 정서는 피아노와 재즈라는 보편적인 언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앨범에서 티그란 하마시안은 명확한 타건과 양손의 효율적인 운용으로 곡의 제목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직설적인 방법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What The Waves Brought’에서는 왼손과 오른손의 극적인 교차와 하나됨으로 넘실대는 파도의 역동적 이미지를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Samsara’에서도 다시 한번 맛볼 수 있는데 이 곡에서 그의 두 손은 화려한 아르페지오와 멜로디의 혼합, 그리고 이것의 반복적 구성으로 윤회라는 주제를 멋지게 표현한다. 반면 ‘Illusion’, ‘Longing’, ‘A Memory That Became A Dream’, ‘Mother Where Are You’등의 느린 연주곡에서는 드뷔시의 인상주의 클래식을 연상하게 하는 연주로 몽상적 서정을 느끼게 해준다. 한편 피아노 솔로 앨범답게 피아노 솔로 연주에 주력하면서도 그는 음악적 주제와 표현의지에 따라 키보드를 오버 더빙하거나 자신의 노래와 허밍을 과감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앨범은 그 극적인 구성만큼 사운드에 있어서도 다채로운 모습을 보인다.

재즈사를 보면 지금까지 세상을 놀라게 한 많은 어린 연주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세상을 놀라게 하는 힘을 오랜 시간 유지한 연주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은 재즈 또한 순간의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탄탄한 연주력만큼이나 풍부한 음악적 상상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상상력이야 말로 재즈를 늘 새롭게 하는 힘이었는데 많은 신동들은 상상력의 측면에서 꾸준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티그란 하마시안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분명 매번 새로운 상상력으로 음악을 통해 감상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나아가 새로운 꿈을 꾸게 하리라 믿는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이 앨범 <A Fable>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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