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을 보여준 기타 연주
한 여름이다. 가만히 있어도 굵은 땀방울이 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누가 보면 여러 시간 열심히 일한 줄 알겠다. 하긴 이렇게 무더운 날에는 움직이는 것 자체가 일이 된다. 특히 오후 두 시경에 그늘 없는 거리를 걷는 것은 그 자체로 중노동이다. 이런 도시의 무더위가 싫어서 사람들은 바다로 산으로 떠난다. 하지만 이래저래 떠날 수 없는 나는 음악을 들으며 여름을 버틴다.
여름이면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까? 아마도 브라질의 바다내음이 가득한 보사노바나 삼바가 제일 일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다. 보사노바나 라틴 재즈를 들으면서 바다를 생각하고 시원한 바람 그리고 밤의 축제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사노바 외에 이상하게도 나는 여름이면 그랜트 그린의 연주를 떠올린다. 사실 그의 연주는 겨울이면 모를까? 여름에 듣기엔 그리 좋지 않다. 시원하기 보다는 후덥지근한 느낌을 주는 연주기 때문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무더운 날 길을 걷다가 어느 건물의 에어컨 실외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을 맞았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은 오로지 늘어지는 듯한 연주 스타일 때문이다. 그는 코드도 잘 연주하지 않으면서 마치 엿가락을 늘이듯 멜로디를 느릿느릿 연주하기를 즐긴다. 게다가 특별히 화려한 장식을 사용하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위태롭게 음 하나하나를 이어나간다. 기타 연주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그의 연주를 듣는다면 ‘저 정도라면 나도 한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느린 연주에 오르간이 가세한 소울 재즈의 끈끈함이 더해지면서 여름 날의 후덥지근함이 연주에서 느껴지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런 느린 연주가 아주 싫지가 않다. 하드 밥과 소울 재즈 시대의 동료들이 빠른 연주를 펼치던 시기에 그와 반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느리게 연주한 그의 모습에서 강한 자신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나는 내 방식대로 나의 길을 기겠다는 의지를 나는 느낀다. 그래서인지 그의 느긋한 연주는 때로 모든 것이 다 귀찮다는 듯한 냉소적인 느낌마저 풍기곤 한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1963년도 앨범 <Idle Moment>는 그 타이틀만큼이나 나른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그 가운데 앨범 타이틀 곡은 14분이 넘는 긴 연주 시간을 자랑하는데 원래는 이보다 짧게 연주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연주자들이 착각으로 솔로가 길어지면서 원래보다 긴 곡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괜찮아서 그냥 앨범에 실었다고 하는데 연주자들의 착각이 리더의 느긋한 스타일 때문에 시간을 혼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편 다른 동료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그랜트 그린의 독특한 스타일은 그의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게 했다. 내가 처음 그의 기타 연주를 듣고 느꼈던 것처럼 다른 연주자나 평자들도 그의 연주를 특별한 노력 없이 그저 대충 천천히 연주하면 되는 것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여기에는 그가 가스펠, 라틴, 소울, 펑키 재즈 등 당시로서는 비교적 대중적인 성향의 연주를 즐긴 것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그의 연주는 대중적으로 그렇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사실 그의 연주는 실력 없는 연주자의 불량한 연주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가 코드를 잘 연주하지 않고 멜로디 중심으로 연주하게 된 것은 그가 기타 연주자보다는 색소폰 연주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놀랍게도 그는 찰리 파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알다시피 찰리 파커 하면 누구보다 빠른 연주를 즐겼던 인물이 아닌가? 아마도 그도 다른 연주자들처럼 찰리 파커의 빠른 연주를 들으며 이 비밥의 창시자보다 더 빠르게 연주할 수 없겠다는 좌절감을 느끼고 그와 반대로 연주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여백을 충분히 두고 멜로디를 담백하게 이어가는 방식이 그러고 보면 마일스 데이비스를 닮았다.
저평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랜트 그린을 인정한 사람도 있었다. 먼저 그는 루 도날드손에게 발굴되었다. 이 색소폰 연주자는 그를 블루 노트 레이블의 알프레드 라이언에게 소개했다. 그런데 이 제작자는 보통 사이드맨 활동을 먼저 시키고 후에 솔로 앨범을 제작해주던 관행을 깨고 곧바로 솔로 앨범을 녹음할 정도로 그랜트 그린의 연주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10년에 걸쳐 꾸준히 그의 앨범을 제작했다. 아쉽다면 그 또한 기타 연주자의 대중성에 확신을 갖지 못해 상당수의 앨범을 창고에 묵혀두었다는 것이다. 현재 그랜트 그린이 그나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그의 사후에 앨범들이 대거 발매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전에 그 앨범들이 발매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가 남긴 연주가운데 속도감 있는 연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 사이에 펑키한 스타일로 연주할 때는 흥겨운 리듬을 따라 그도 나름 속도감 있는 연주를 펼치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연주는 여백이 많고 어슬렁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나는 그의 느린 연주가 단순히 음악적인 부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랜트 그린이 기타 연주만큼이나 느린 속도로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게으른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냥 세상의 속도와 상관 없이 그만의 여유로운 삶을 살았을 것만 같다. 그래서 무더운 여름 날 후덥지근한 그의 기타 연주를 들으면서 삶의 여유, 나태함의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하릴없이 빈둥거릴 수만 있다면 무더위가 무슨 상관 인가? 지금 우리가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더위에 어울리는 느린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럴 때 그랜트 그린의 기타 연주를 들어보자. 적어도 잠시나마 더위를 견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열치열(以熱治熱)의 방법이라고 해도 말이다.
대표 앨범
Idle Moments (Blue Note 1963)
그랜트 그린 하면 꼭 들어야 하는 대표작이다. 이 앨범에서 그의 연주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나른, 나태의 극치를 들려준다. 느리게 연주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준다고 할까? 여기엔 바비 허처슨의 비브라폰이 지닌 몽롱함, 듀크 피어슨의 피아노가 분출하는 따뜻한 기운이 한 몫 했다. 즉, 그랜트 그린 혼자만의 힘으로 이 한적한 연주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뜻. 결국 이 앨범 또한 동시대의 흐름과 다른 면이 있었지만 하드 밥 앨범이었던 것이다.
The Matador (Blue Note 1964)
어쩌면 그랜트 그린의 여러 앨범들 가운데서 의외성이 강한 앨범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함께 한 연주자들의 면모 때문이다. 당시 가장 뜨거운 연주를 펼쳤던 존 콜트레인 쿼텟의 멤버들과 호흡을 맞추었던 것이다. 게다가‘My Favorite Thing’을 연주하면서 이 곡을 모달 재즈의 대표작으로 만든 존 콜트레인의 편곡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하지만 그랜트 그린의 기타 연주는 뜨거움과는 거리가 먼, 여전히 냉소적이다 싶을 정도로 쿨한 모습을 보인다.
Live At The Light House (Blue Note 1972)
1960년대 후반부터 그랜트 그린 또한 시대의 흐름을 따라 펑키 스타일의 연주를 즐겼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라이트 하우스 클럽에서의 공연을 담고 있는 이 앨범이 대표적이다. 이 앨범에서 그린트 그린은 펑키한 리듬 위를 경쾌하게 달린다. 하지만 특유의 과장 없는 멜로디 중심의 연주를 펼치기에 복잡한 느낌보다는 담백한 느낌이 강하다. 간결한 그루브가 무엇인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앨범.
Down here on the ground 에서 이분의 연주를 처음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연주에 대한 강한 자신감 떄문이었을까요? 그의 연주에서는 Cool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멋있어요.
출근길… 그랜트 그린의 음악을 듣다가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단 생각이 들어 구글에 검색을 해보고 들어왔습니다.
제가 재즈를 알게 되고 듣게 된것이 돌이켜 보니 20년이 다 되어가네요…
그때는 재즈를 알고 들으려면 꽤나 많은 노력을 들여야했지요. 당시 중학생이었던 저는 재즈와 그에 대한 정보를 오직 악기 선생에게 얻어야만했지요.
지금은 좋은 책도 많이 나오고, 영상이나 음악도 접하기가 쉬운 시대입니다. 웹상에 이렇게 좋은 공간도 있고요.
오늘날 재즈는 구시대 유물로 취급 받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글쎄요… 저는 아직 재즈 이후로 그보다 제 기호에 잘 맞는 장르는 없더라구요.
홈페이지에 관한, 글쓰신 분에 대한 글도 정독해 보았는데요. 자주 들어올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좋은 공간 마련하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20년이면 재즈를 좋아하신지 오래되셨네요.
재즈는 여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말씀하신 구시대 유물을 더 선호하시는 것 같습니다. ㅎ
사실 뭐 옛것이건 새것이건 내가 좋으면 그만이죠.
이 곳이 마음에 드셨다니 종종 와주시기 바랍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