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재즈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빠지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전까지 나는 록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재즈를 잘 몰랐다. 70년대 퓨전 재즈를 종종 듣곤 했지만 그 또한 재즈가 아니라 퓨전 재즈 안의 록적인 맛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90분짜리 카세트 테이프에 여러 재즈 곡들을 녹음해 내게 선물했는데 그것이 나를 재즈의 세계로 이끌었다. (당시엔 친구들끼리 공 테이프에 음악을 녹음해 선물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 친구가 테이프에 녹음해준 곡들 가운데는 소니 롤린스의 1956년도 앨범 <Saxophone Colossus>의 수록곡 ‘Moritat’가 있었다. 약 10분 정도되는 곡이었는데 나는 단번에 이 곡에 빠졌다. 그렇다고 내가 이 곡을 잘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친숙한 멜로디가 흥겹게 이어지는 것이 좋았을 뿐이었다. 중간에 이어지는 각 연주자의 솔로는 사실 잘 따라가지 못했을뿐더러 살짝 지루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테마가 반복되면 좋아하곤 했다.
재즈를 잘 몰랐던 만큼 소니 롤린스에 대해서도 나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연주를 들으며 이 색소폰 연주자가 상당히 나이가 많겠구나 생각했다. 묵직한 톤과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과감하고 거대한 상상력이 어지간한 삶의 연륜이 아니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못해도 60은 되어야 가능하겠다 싶었다. 그러나 후에 앨범 <Saxophone Colossus> 전체를 듣게 되면서 이 앨범이 1956년 그러니까 1930년생인 소니 롤린스가 26세였을 때 녹음되었다는 것을 알고서는 깜짝 놀랐다. 20대 중반의 청춘이 어쩌면 이렇게 자기 신념이 굳건한 연주를 펼칠 수 있을까?
물론 여기에는 내가 1950년대 재즈계를 막연히 신화적으로 바라본 탓도 있을 것이다. 콜맨 호킨스와 레스터 영에서 시작된 색소폰의 계보다 찰리 파커 이후 1,2년 사이로 발전하던 때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당시엔 모든 연주자들이 젊은 나이에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의 아이돌 가수들이 10대에 활동을 시작하는 것처럼 말리다. 소니 롤린스도 10대 후반에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니 1956년이면 7,8년의 경력을 쌓은 상태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는 많은 연주자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숱한 전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들면 소니 롤린스는 앨범 <Saxophone Colossus>를 녹음하기 한달 전에 앨범 <Tenor Madness>를 녹음했는데 이 앨범의 타이틀 곡에는 존 콜트레인이 함께 했다. 당시에는 단순한 만남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았지만 이후 나이는 소니 롤린스보다 4살 많았지만 아직 주목을 받지 못했던 존 콜트레인이 유명해 지면서 역사적인 만남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처럼 1950년대의 재즈가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고 해도 소니 롤린스가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 보다 완성형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그런데 이후 소니 롤린스의 삶을 보면 그가 색소폰을 하나의 구도(求道)로 생각했기에 이른 나이에 범접하기 어려운 깊이를 얻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만 집중한 연주자였다. 마일스 데이비스나 존 콜트레인이 자신의 음악에 집중하면서도 함께 하는 밴드 멤버의 도움을 적절히 활용했던 것과 달리 그는 혼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모든 난관을 극복하려 했다. 그래서 마일스 데이비스의 퀸텟이나 존 콜트레인의 클래식 쿼텟처럼 소니 롤린스 하면 떠올리게 되는 밴드가 없다.
소니 롤린스가 색소폰을 구도의 수단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그의 두 번의 잠적이 말해준다. 특히 첫 번째 잠적은 지금까지도 하나의 전설로 남아 있다. <Saxophone Colossus>앨범에 이어 <Way Out West>(1957), <Freedom Suite>(1958) 등의 앨범이 잇달아 성공하면서 명실 상부한 정상의 위치에 올랐던 1959년 그는 돌연 재즈계에서 사라졌다.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잠적이었기에 그가 사망했다는 추측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 사이 그는 맨하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윌리엄스버그 다리에서 이른 새벽 홀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이 잠적에 대해 그는 자신이 너무나도 빠른 시간에 인기를 얻었던 것에 부담을 느꼈고 또 더 이상 새로운 연주를 보여줄 것이 없다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후에 설명했다.
윌리엄스버그 다리에서 1962년까지 3년간 홀로 연습한 이후 그는 <The Bridge>라는 의미 심장한 타이틀을 지닌 앨범으로 다시 복귀했다. 그리고 10여 년간 다시 정상의 연주자로서 꾸준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70년대가 되면서 재즈가 대중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고 이와 함께 퓨전 재즈를 비롯한 재즈의 근간을 뒤흔드는 스타일이 등장하자 그는 다시 한번 물러서기를 결심했다. 자신을 잃고 무작정 새로운 흐름을 따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새로운 그만의 무엇이 쌓이기를 기다리면서 그는 이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었던 요가와 명상, 인도철학에 심취했다. 그리고 1972년 다시 재즈계로 돌아와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다. 그가 선보인 음악은 록, R&B, 펑크 등을 받아들인 당시의 재즈에 호응하는 것이면서도 스타일에 경도되지 않은 정신적 깊이를 지닌 것이었다. 질감은 대중적이었지만 실제는 더욱 진지한 음악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에 들어서도 소니 롤린스는 자신에 충실한 연주를 이어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985년에 발매된 <The Solo Album>일 것이다. 이 앨범에서 그는 마치 키스 자렛의 솔로 콘서트처럼 혼자서 30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색소폰 솔로를 펼친다. 190년대 이후에는 앨범 활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그의 주요 활동은 공연에 집중되어 있다. 그 공연을 앨범으로 발매하고 있는데 이 공연 실황 앨범들에서도 그는 현실적인 나이와 상관 없이 1956년 당시의 꿈틀거리는 열기를 그대로 들려준다. 그리고 그 젊음의 에너지로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많다고 말한다.
다시 <Saxophone Colossus>앨범을 듣는다. 당시 그가 26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들어도 이 앨범에 담긴 연주는 대가적인 맛이 난다. 앨범 타이틀을‘색소폰의 거상(巨像)’이라 정한 것이 절대로 과욕이나 오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 앨범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먼 훗날 색소폰의 거장으로 인정받게 되리라는 자기 암시, 이를 위해서는 외롭지만 꾸준한 자기 성찰과 연습이 필요할 것임을 그는 스스로 알고 이를 따르기로 결심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현재 그는 자신의 운명을 완성한 셈이다.
대표 앨범
Saxophone Colossus (Prestige 1956)
소니 롤린스 하면 제일 먼저 들어야 하는 앨범이다. 이 앨범의 매력은 탁월한 연주에 있지만 대중적인 친화력 또한 강하다는데 있다. 이미 거장의 모습으로 공간을 압도하는 연주 가운데서도 소니 롤린스는 곳곳에서 유쾌한 모습으로 감상자에게 말을 건다. 이국적인 칼립소 리듬을 배경으로 스타카토로 테마를 경쾌하게 연주한‘St.Thomas’가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Moritat’, ‘Strode Rode’같은 곡이 색소폰 연주자의 뛰어남을 경험하게 한다.
A Night at the Village Vanguard (Blue Note 1958)
1957년 <Way Out West>를 당시로서는 무척 드문 피아노 없는 트리오 편성으로 녹음하면서 새로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힘입어 같은 해 가을 빌리지 뱅가드 클럽에서 낮과 밤에 걸쳐 각기 다른 멤버들과 두 번의 트리오 공연을 펼쳤다. 그리고 그 공연은 재즈 역사상 빛나는 명연으로 기록되고 있다. 실제 피아노가 빠진 공간을 자유로이 유영하는, 열정과 위트가 결합된 절정의 연주력과 긴박한 인터플레이는 음반으로 들어도 무척이나 짜릿하다.
The Bridge (RCA 1962)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약 3년간 윌리엄스 다리에 잠적해 홀로 색소폰을 연습한 이후 소니 롤린스는 다시 굳건한 모습으로 재즈계로 돌아왔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앨범이었다. 피아노 대신 짐 홀의 기타를 포함시킨 쿼텟 편성으로 녹음한 이 앨범에서 그는 과거 <Saxophone Colossus> 시절과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이전에 비해 진지하고 성숙한 연주를 선보였다. 그것은 그가 정신적으로 보다 자유로워졌음을 알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