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제나 자기 모습을 유지했던 연주자
지난 발렌타인 데이에 피아노 연주자 조지 시어링이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부전증. 우리 나이로 93세면 어느 정도 천수(天壽)를 부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징조는 몇 해전부터 보였다. 그렇다고 그의 건강 상태를 알았다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새로운 앨범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불안한 예상을 하게 했던 것이다. 실제 그는 2004년 뉴욕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쓰러진 이후부터 활동을 하지 못했다.
단지 최근 새로운 앨범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한 연주자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지 시어링은 달랐다. 그는 1949년부터 거의 매해 앨범을 발표했다. 공백기라면 1960년대 후반 캐피톨 레코드와 결별하고 쉐바(Sheba)라는 이름의 레이블을 직접 설립할 때까지의 3,4년이 유일했다. 게다가 그는 한 해에 두세 장씩 앨범을 발표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의 이름으로 발매된 정규 앨범은 100장이 넘는다. 그러니 말년의 공백에서 건강 이상을 예상할 수 밖에.
재즈사를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은 10년 단위로 재즈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말하곤 한다. 너무 일반화한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의 새로운 사조가 나왔다고 해도 이전 사조가 완전히 과거의 것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존 사조는 새로운 사조에 재즈의 중심 자리를 내줄지라도 독자적인 생명력으로 재즈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 나간다. 여기에는 혁명가가 되어 재즈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하나의 사조를 끝까지 고집하고 그 사조를 탄탄하게 유지했던 수 많은 연주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국 출신으로 선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했던 조지 시어링도 그런 연주자에 속한다. 60여 년의 리더 활동을 하는 동안 재즈는 밥에서 쿨로, 쿨에서 하드 밥으로 하드 밥에서 프리 재즈와 퓨전 재즈로 그리고 다시 오늘의 포스트 밥, 스무드 재즈 등으로 다양하게 모습을 바꿔왔다. 그러나 조지 시어링은 자신의 연주를 그리 크게 바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연주는 지루하거나 지겹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지겹다는 느낌을 주었다면 100장 이상의 앨범을 발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음악은 언제나 마음이 푸근해지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처럼 늘 그 자리에 있어 고맙고 편안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찌 보면 그는 빠르게 얼굴을 바꾸는 재즈의 역사 가운데 변하지 않는 재즈만의 본질을 붙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연주가 오랜 시간 질리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그의 연주가 재즈의 기본을 지키면서도 시대를 앞서간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그는 재즈의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재즈 피아노 연주법에 있어 큰 유산을 남겼다. 그는 당시까지 왼손으로 베이스 라인을 연주하고 오른 손으로 멜로디를 연주하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왼손으로도 코드를 연주하면서 그 속에서 멜로디를 같이 연주하는 주법- 흔히 록핸드(Locked Hand)주법이라 불리는-을 선보였다. 이렇게 연주하면 멜로디적인 측면이 잘 부각되면서도 사운드의 볼륨감이 그대로 유지되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이후 많은 연주자들이 그의 연주법을 따르게 되었는데 그 결과 이제는 재즈 피아노 연주자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기본 연주법이 되었다. 또한 그는 트리오보다는 퀸텟 연주를 즐겼다. 그가 이끈 퀸텟은 피아노 트리오에 기타와 비브라폰이 가세한 것으로 악기 가운데 피아노, 기타, 비브라폰이 함께 멜로디를 연주함으로써 멜로디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곤 했다. 그리고 비밥과 쿨의 매력에 라틴 재즈적인 색채를 가미하여 지금 들어도 신선한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60년 이상을 활동하면서 큰 기복 없는 연주를 펼쳤지만 그래도 그의 전성기를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1950년대가 아니었나 싶다. 이 때 그는 젊었고 재즈라는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연주에 열광하고 황홀해 했다. 이것은 비트 문학의 리더였던 잭 케루악의 대표 소설 <길 위에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비밥의 시대에 미국 전역을 유랑하는 젊은이들을 묘사한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친구 딘과 함께 조지 시어링의 연주를 듣기 위해 뉴욕의 버드랜드 클럽에 간다.
‘……시어링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들뜬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어 댔다. 처음에는 천천히 흔들다가, 박자가 빨라지기 시작하면서 몸짓도 점점 더 빨라졌다. 왼발은 박자에 맞춰 겅충겅충 뛰는 듯했고, 목은 어찌나 격렬하게 흔들어 대는지 얼굴이 거의 건반에 닿을 정도였다. 시어링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잘 빗겨 있던 머리칼이 완전히 헝클어져 있었다. 그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음악이 더 빨라졌다……. 시어링이 화음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지듯 피아노에서 화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 화음들을 순서대로 늘어놓을 시간도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화음은 바다처럼 끝도 없이 계속해서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댔고 딘은 땀을 흘렸다. 땀이 그의 칼라를 타고 줄기차게 흘러내렸다. “바로 저거야! 저 사람이야! 피아노의 신! 시어링은 신이야! 그래! 그래! 그래!”……’
(<길 위에서 1>, 잭 케루악, 이만식 옮김, 민음사 2009, p209)
잭 케루악의 표현대로라면 젊은 시절 조지 시어링의 음악은 대단히 뜨거웠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과거 앨범들을 들어보면 지금보다 더 풋풋한 느낌은 들 지라도 그렇게 막 뜨거웠단 느낌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는 산뜻하고 청량한 느낌을 받을 지 모르겠다. 왜 그럴까? 그것은 50년대의 감수성과 지금의 감수성이 달랐기 때문이다. 즉, 조지 시어링은 변하지 않았는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재즈의 모습이 변했고 감상자의 취향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50년대에는 그토록 열정적으로 다가왔던 그의 음악이 이제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음악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늘 그 자리에 있었기에 그의 연주 스타일이 친숙해졌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대표 앨범
Verve Jazz Masters 57 (Verve 1996)
조지 시어링의 초기 앨범은 MGM 레이블에 집중되어 있다. 이 앨범은 그 당시의 음원을 정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조지 시어링을 지금까지 대표하는 ‘September In The Rain’과 ‘Lullaby Of Birdland’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 곡들은 처음에 싱글로 발표되어 조지 시어링이 인기를 얻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외에 앨범 전체에 흐르는 장황하지 않고 깔끔하게 제시된 테마, 그리고 간결한 솔로를 담은 곡들이 조지 시어링과 그 퀸텟의 연주가 지닌 매력을 확인하게 한다.
The Swingin’s Mutual! (Blue Note 1961)
1950년대 후반부터 조지 시어링은 높은 인기에 힘입어 내 킹 콜, 다코타 스탠튼, 페기 리 같은 보컬들과 앨범을 녹음하곤 했다. 이 앨범에서는 낸시 윌슨과 함께 했다. 이 앨범에서 그와 퀸텟의 연주는 낸시 윌슨을 매력적으로 드러내가 하는데 주력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특유의 산뜻함은 여전히 빛이 난다. 그리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연주의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조지 시어링의 지원에 힘입어 낸시 윌슨 또한 그 무렵 그녀의 여러 앨범들 가운데 가장 재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An Evening with George Shearing & Mel Tormé (Concord 1982)
70년대에 음악적으로 살짝 침체기를 겪은 조지 시어링은 콩코드 레이블과 계약하면서 다시 한번 음악적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부드러우면서도 남성적 매력을 지닌 보컬 멜 토르메와 함께 한 이 앨범은 그의 연주, 그의 음악이 아직 건재함을 세상을 다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그의 피아노와 멜 토르메의 보컬이 너무나도 자연스레 어울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지 시어링의 후기 활동을 확인하고자 할 때 꼭 들어야 하는 앨범이다.
아…좋네요. 조지 시어링이란 피아노 마스터도 이 글도..
고맙습니다. 음악이 좋은거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