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식 할머니 – 백기림(백호빈) (한양영화공사 1964)

지난 일요일 EBS 한국영화특선을 통해 본 영화. 그냥 첫 장면만 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끝까지 보게 되었다. 영화의 내용은 합리적이라 평가 받는 서양식 사고를 지닌 할머니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보다 넓게 바꿔준다-할머니 표현대로라면 체질 개선-는 내용인데 손자의 결혼 문제로 인한 갈등을 중심으로 여러 사건들이 얽혀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영화 제목에서 이미 짐작된 것인데 이런 내용을 통해 영화는 계몽주의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가족계획, 보수적인 남녀관의 타파, 시스템에 예속되지 않는 주체성, 새로운 세대의 감성을 허용하자는 보수적인 구세대에 대한 충고 등이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 그러나 그리 불편하지 않게 나온다. 따라서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재미있는 영화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원래 KBS의 전신인 HLKA 방송국의 인기 주간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당시에 이런 주제가 많은 호응을 얻었던 모양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 시선을 끌었던 것은 영화 속 문제의 커플 김한국-얼마나 계몽적인 이름이냐!-과 장미아 커플이 만나던 한옥 스타일의 카페와 그 앞의 넓은 정원이었다. 지금 모두 빌딩으로 바뀌었겠지만 지금 저런 공간이 있다면 더 큰 인기를 얻었겠다 싶다. 그리고 장미아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풍경들. 확실히 당시에 아파트는 독신자들이나 그리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인 듯싶다. 하긴 2층 양옥집을 짓고 사는 것이 한때 부자의 기준이었으니.

영화의 주연인 신식할머니는 조미령이 맡았다. 그런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35세. 당시 분위기가 젊은 배우가 노인 역할을 하는 시대였으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며느리 역할로 그녀보다 다섯이나 많은 황정순이 나온다는 것. 게다가 황 정순하면 할머니 역할의 대명사 아니던가? 그래서 보는 내내 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젊은 역할의 여배우들은 잘 모르겠는데 김한국역의 남석훈이 당시 25세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얼굴이 아닌 스타일의 문제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릴 적 회사 다니는 20대 아저씨들을 보면 모두 30대 이상의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다.

한편 이 영화에는 조연으로 이은심이 등장한다. 그렇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서 그 광기 어린 역할을 했던 그 이은심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아주 참하고 건전한 아가씨 역으로 나온다. 이은심이 비중이 아주 작은 이 역할을 연기한 것은 아무래도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 <하녀>이후 그녀는 <하녀>와 비슷한 배역만 제의가 들어와 실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역할을 기꺼이 맡지 않았을까? 실제 이 영화를 끝으로 그녀는 영화계를 떠나 결혼하여 브라질로 이민을 하게 된다.

이은심의 경우보다 더 흥미로운,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인물이 이 영화에 등장한다. 바로 장미아 역할을 맡은 방성자. 그녀는 지금 봐도 예쁜 시대를 앞서간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60년대 많은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스타였다. 그러나 당시 유명 재벌이었던 <동림산업>의 아들 함기준과 은밀히 동거를 하다가 도둑을 맞게 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당시 함기준은 방성자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미국에서 결혼을 했던 유부남으로 한국에는 군복무를 위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뇌물로 공군 소속이지만 파견형태로 군부대 생활을 하지 않고 밖에서 생활하다가 방성자를 알게 되어 당시 30이었던 그녀와 동거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도둑이 침입하자 총으로 그 도둑을 죽이게 되었다.  그런데 방성자는 함기준을 많이 사랑했던 듯하다. 자신이 연기를 통해 총을 쏘는 법을 배웠으며 소품으로 가지고 있던 총으로 도둑을 쐈다고 진술한 것이다. 그래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판사 앞에서 총 쏘는 모습을 시연하면서 그녀가 총을 쏠 줄 모르는 것이 발각되어 결국 애인 함기준이 체포되게 되었다. (그는 3년형을 받았으나 항소하여 집행유예로 풀려났다고 한다.) 그래서 짧은 감옥 생활 이후 풀려나게 되었지만 이미 그녀는 배우 계에서 제명을 당하는 등 활동을 이어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사랑을 이어갈 수도 없었다. 특히 당시 기자들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아름답게 봐 달라’ 부탁한 이야기는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를 보면 확실히 그녀는 함기준을 아끼고 사랑했다. 실제 감옥에서도 그의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은퇴 후 부산에 가서 술집 마담으로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듣자 하니 원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영화배우가 되었다고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인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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