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1926. 5.26 ~ 1991. 9.28)

재즈는 백 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클래식이나 기타 전통 음악에 비해 짧은 역사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사이 재즈사를 빛낸 별들은 무수히 많다. 그래도 그 가운데 한 명을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마일스 데이비스를 선택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에 의해, 그를 통해 재즈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비밥 시대 이후 재즈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리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마치 그는 아케이드 게임을 하듯 하나의 사조를 만들어 낸 후 한계에 왔다 싶으면 과감하게 다른 사조를 만들어 냈다.

그가 재즈사에 등장한 것은 1944년 줄리어드 음대에 입학하기 위해 뉴욕에 오면서부터였다. 당시 재즈는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를 중심으로 한 비밥 열풍에 빠져 있었다. 마일스 데이비스 또한 뉴욕에 오자마자 자신의 우상과 함께 무대에 서기를 시도했다. 그래서 찰리 파커와 몇 인상적인 연주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서커스처럼 빠른 속도와 현란한 기교가 요구되는 비밥 스타일의 연주는 그에게 잘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이미 찰리 파커가 비밥의 주요인물로 우뚝 선 상황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1948년 작·편곡자 길 에반스를 비롯하여 제리 멀리건, 리 코니츠 등 당시의 비밥 재즈와는 다른 새로운 재즈를 꿈꾸던 신예 연주자들을 규합하여 연주 스타일부터 악기 편성까지 기존과는 다른 지적이고 차분한 분위기의 재즈를 녹음했다. 그러나 너무나 실험적이었는지 이 녹음은 1956년에야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그 앨범이 바로 <Birth Of The Cool>이었다.

그래도 마일스 데이비스가 본격적으로 재즈계의 리더로 부상하게 된 것은‘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을 결성하면서부터였다. 그의 트럼펫을 중심으로 존 콜트레인(색소폰), 레드 갈란드(피아노), 폴 체임버스(베이스), 필리 조 존스(드럼)로 구성된 이 퀸텟은 1955년 뉴 포트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Relaxin’>, <Steamin’>, <Workin’>, <Cookin’>, <Round Midnight> 등의 앨범을 발표하며 하드 밥 시대는 물론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퀸텟으로 자리잡았다. 이 퀜텟이 인기를 얻었던 것은 마일스 데이비스 개인이 아닌 멤버 전체의 완벽한 조화 때문이었다. 특히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이 보여준 선명한 대비는 퀸텟의 인기를 높이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워낙 이 퀸텟이 완벽했기 때문일까? 1964년 새로운 퀸텟을 결성하기 전까지 마일스 데이비스는 다양한 라이브 연주를 통해 연주자들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첫 번째 퀸텟의 해체 이후 웨인 쇼터(색소폰), 허비 행콕(피아노), 론 카터(베이스), 토니 윌리엄즈(드럼)으로 이루어진 두 번째 퀸텟이 결성되기 전까지 그의 앨범은 스튜디오보다는 라이브 앨범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길 에반스의 오케스트레이션을 활용한 솔로 앨범이 주를 이룬다.

한가지 예외가 있다면 앨범 <Kind Of Blue>일 것이다. 첫 번째 퀸텟이 해체된 1959년, 하드 밥의 코드에 기반한 연주에 싫증이 난 그는 피아노 연주자 빌 에반스와 조지 러셀 등의 아이디어를 적용하여 모드(Mode)를 중심으로 연주를 펼치는 모달 재즈를 시도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존 콜트레인, 캐논볼 아들레이, 빌 에반스, 윈튼 켈리, 폴 체임버스, 지미 콥 등이 참여한 <Kind Of Blue>였다. 이 앨범은 무인도에 가져 가고픈 단 한 장의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큰 사랑을 받으며 현재까지 재즈 역사상 가장 많이 판매된 앨범으로 기록되고 있다.

재즈 사조의 역사에서 마일스 데이비스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프리 재즈였다. 아무래도 멜로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에게 프리 재즈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도였던 것 같다. 아니면 다른 연주자가 먼저 시도한 것을 따라서 하기엔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겠다. 게다가 그는 프리 재즈가 재즈를 대중으로부터 더 떨어지게 만드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1960년대 후반 대중 음악을 지배하고 있던 펑크와 록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 전자 기타를 들고나온 지미 헨드릭스의 록 음악은 그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 결과 그는 1969년 어쿠스틱 악기보다는 일렉트릭 피아노, 일렉트릭 기타가 전면에 부각된 새로운 개념의 그룹을 결성하여 록의 영향을 받은 앨범 <Bitches Brew>를 발표했다. 퓨전 재즈의 효시로 기억되고 있는 이 앨범은 지금의 퓨전 재즈와는 다른 무척이나 자유로운 사운드를 담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프리 재즈의 집단 즉흥 연주를 자기식대로 차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마일스 데이비스는 199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즈사의 주요 변화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는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새로운 재즈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을까? 이것은 물론 그의 쉬지 않는 실험정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함께 한 연주자들의 숨은 능력을 발굴하는 혜안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존 콜트레인이라는 신예가 지닌 폭발적인 잠재력을 보지 못했다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퀸텟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빌 에반스의 피아니즘에 반응하지 못했다면 과연 모달 재즈는 물론 재즈사의 명작 <Kind Of Blue>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과연 그가 지미 헨드릭스의 일렉트릭 기타 연주를 재즈와 무관한 것이라 생각하고 무시했다면 퓨전 재즈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는 연주자라면 지명도를 가리지 않았다. 실제 두 번째 퀸텟을 결성하기까지 긴 탐색을 하는 동안 그는 여러 유명한 연주자들을 과감하게 내치기도 했다. 그랬기에 그의 음악은 그 자신 뿐 아니라 밴드 멤버 각자를 빛내게 했다. 그래서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한 경력이 있는 연주자들 대부분은 재즈의 주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마커스 밀러, 키스 자렛, 데이브 홀랜드, 칙 코리아, 존 스코필드 등 현 재즈의 리더들은 대부분 마일스 데이비스의 후예들이다. 신예 연주자들 또한 마일스 데이비스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재즈를 만들고 있다. 따라서 현재를 지배하는 대부분의 재즈의 과거에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연주자로서도 마일스 데이비스는 상당한 개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어떠한 편성, 어떠한 사조에서건 낭만적인 멜로디를 만들어 낼 줄 알았다. 특히 그의 뮤트 트럼펫 연주는 차갑고 가냘픈 소리와 달리 강력한 아우라로 전체 사운드를 지배하는 힘이 있었다. 이 또한 함께한 연주자들과의 대비 효과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결국 그가 재즈 역사를 이끈 힘은 타인에 대한 열려 있는 시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그가 세상을 떠나고 없는 지금까지 많은 후배 연주자들이 그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표 앨범

Round Midnight (Columbia 1958)

첫 번째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앨범이다. 사실 이 퀸텟의 이름으로 발매된 앨범들은 모두가 명반이다. 특히 마라톤 세션으로 단 번에 녹음된 4장의 앨범은 이 앨범과 함께 꼭 들어야 하는 앨범이다. 그럼에도 이 앨범을 먼저 추천하는 것은 차가움과 뜨거움의 중간에서 차분하게 자신만의 공간을 설정하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뮤트 트럼펫이 가장 매력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앨범의 타이틀 곡 ‘Round Midnight’에서 존 콜트레인과의 강렬한 대비 효과는 명연 중의 명연이라 할만한 것이었다.

Kind Of Blue (Columbia 1959)

재즈를 듣는 사람이라면 이 앨범은 꼭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앨범은 지금까지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재즈 앨범의 첫 번째로 선정될 만큼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실제 모달 재즈를 대표하는 ‘So What’을 위시하여 인상주의 클래식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Blue In Green’, 12 마디 블루스 곡‘All Blues’등 앨범에 담긴 곡들은 어느 하나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각각 독특한 개성을 담고 있다. 그리고 어느 특정 정서에 치우치지 않는 신비로운 분위기야 말로 앨범을 질리지 않게 만드는 가장 큰 매력이다.

Doo Bop (Warner 1992)

마일스 데이비스의 마지막 스튜디오 녹음을 담고 있는 앨범이다. 사실 이 앨범을 그의 주요 앨범으로 추천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보다 음악적으로 뛰어난 앨범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서도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의 새로움을 이끌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면 이 앨범을 들을 필요가 있다. 힙합 풍의 랩을 차용하고 첨단의 샘플링 기법을 활용한 사운드는 지금 들어도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재즈를 가미한 일렉트로니카 음악, 스무드 재즈 등의 모든 원형이 이 앨범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2 COMMENTS

  1. kind of blue를 듣는데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이 불현듯 생각나네요..

    아…진짜.. 빌 에반스의 피아노 연주와 정말 잘 어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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