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천재 피아노 연주자
피아노 연주자 버드 파웰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나는 롤러코스터를 떠올리곤 한다. 높은 곳에서 빠른 속도로 낙하하여 그로 인해 발생한 힘을 이용해 다시 높은 곳으로 비상했다가 다시 낙하를 거듭하는 롤러코스터. 실제 질주하듯 빠른 속도로 피아노의 아래 위를 자유로이 오가는 버드 파웰 특유의 연주는 롤러코스터같다. 그는 일체의 침묵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빠른 속도로 음들을 이어나가는 연주를 즐겼다. 그래서 그의 연주를 듣다보면 모든 음들이 줄줄이 이어져 하나의 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속도에 미쳐 되는 대로 연주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그 연주가 논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평범한 감상자 이전에 많은 연주자들이 버드 파웰을 두고 천재라 불렀다. 예로 그 역시 천재라는 소리를 듣곤 했던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는 간단하게‘버드는 천재다.’라는 말로 동료를 평가했다. 또한 듀크 엘링턴은 한술 더 떠 ‘버드는 진정한 천재다’라며 피아노 연주자를 극찬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블루 노트와 버브 레이블은 버드 파웰의 앨범을 제작하면서 각각 <The Amazing Bud Powell>, <The Genius Of Bud Powell> 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내가 생각해도 버드 파웰은 빠른 연주를 요구했던 비밥 시대에 가장 어울렸던 피아노 연주자였다. 그와 우정을 나누었고 또 그를 비밥의 혁명 속으로 이끌었던 델로니어스 몽크도 비밥 시대의 대표적인 피아노 연주자로 평가 받고 있지만 서커스에 가까웠던 버드 파웰의 연주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 대신에 그는 과감한 코드의 진행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했다.) 실제 그는‘아무도 버드 파웰처럼 연주할 수 없다. 너무 어렵고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정말 놀랍다.’라는 말로 친구의 연주를 찬양했다.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버드 파웰의 연주는 다른 동료 연주자가 아닌 찰리 파커의 색소폰 연주을 라이벌로 삼았다. 즉, 빠르고 현란한 색소폰 솔로처럼 그 역시 피아노로 밴드의 중심에서 자신만의 연주를 펼치려 했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버드 파웰의 빠른 피아노 연주 능력에 초점을 두고 그의 음악을 듣는다면 실망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겨우 이런 것이었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분명 대단한 연주이기는 하지만 요즈음 그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는 연주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젊은 연주자들을 시작으로 재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지점, 시초에서 버드 파웰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실 버드 파웰의 천재성은 빠른 연주에만 있지 않다. 지금까지 그가 위대한 연주자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현재 우리가 재즈 피아노 연주하면 생각하게 되는 연주 방식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비밥의 혁명을 이끈 피아노 연주자라고 하지만 그의 연주는 테디 윌슨이나 아트 테이텀 같은, 역시 빠르게 연주할 줄 알았던 선배 연주자들에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선배들과 다르게 그는 박자에 맞추어 베이스 음과 코드음을 번갈아 연주하곤 했던 스트라이드 피아노의 스타일을 코드를 리듬에 맞추어 연주하는 보다 단순한 형태-보통 이것을 콤핑이라 부른다-로 바꾸고 이전까지 리듬 연주중심으로 솔로를 펼쳐야 했던 오른손에게 보다 과감하고 자유로운 멜로디를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러한 양손의 역할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도록 되도록이면 왼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높은 음역에서 오른손 솔로 연주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일반적이고 평범하게 보이는 피아노 연주법이지만 이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정말 천재가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운. 만약 버드 파웰이 없었다면 재즈 피아노의 역사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적인 성공과 다르게 천재의 삶은 정상적이지 못했다. 내가 그의 연주를 들으며 롤러코스터를 생각하게 된 것은 어쩌면 상승과 하강을 오갔던, 결국에는 파멸로 끝난 그의 비극적 삶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델로니어스 몽크의 소개로 비밥 혁명이 탄생된 민턴즈 플레이하우스 클럽의 연주자 모임에 들어가 비밥 시대의 대표적인 피아노 연주자로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칠 무렵인 1945년, 그는 인종 차별적 상황에서 경찰에게 머리를 맞았다. 이로 인해 평생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1947년 첫 번째 트리오 앨범을 녹음한 후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에 1년 이상 입원하기도 했지만 그때 받은 전기 충격 요법은 오히려 그에게 부분 기억 상실증을 가져다 주었고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이후 고통 완화를 위해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되었고 다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병원에 입원하는 등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병원을 전전하며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그렇기에 그의 활동은 꾸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고통 속에서 녹음한 앨범들은 모두 그의 천재적인 능력을 확인하게 한다.
한편 그는 1959년 지겨운 미국 생활을 피해 프랑스 파리에 갔는데 여기서 그의 연주를 좋아했던 음악 애호가 프란시스 포드라스를 만나 그의 집에 거주하는 등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우정은 버드 파웰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색소폰 연주자 레스터영의 이야기와 어우러져 1986년 프랑스의 영화 감독 베르트랑 타베르니에에 의해 <Round Midnight>이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참고로 이 영화의 주연은 색소폰 연주자 덱스터 고든이 맡았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롤러코스터를 자꾸 타게 되는 것은 속도가 주는 쾌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짧은 시간동안 중력을 향한 하강과 중력에 역행하는 상승이 주는 극적인 쾌감. 어쩌면 버드 파웰이 빠른 속도로 무수한 음들을 끊임없이 연결하는 연주를 즐겼던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질주하는 연주 속에서 스스로 멜로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그는 세상의 중심이 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삶이 롤러코스터처럼 정상과 비정상을 오가게 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천재적 능력은 고통스러운 삶과 맞바꾼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표 앨범
The Amazing Bud Powell, Vol. 1 (Blue Note 1951)
버드 파웰이 블루 노트 레이블에서 녹음한 앨범들은 모두 부제 형식으로라도 The Amazing Bud Powell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그리고 그 타이틀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앨범은 1949년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오히려 뇌손상을 입고 퇴원한 후에 녹음한 퀸텟, 트리오, 솔로 연주를 담고 있다. 그 중 퀸텟 연주는 그가 빠른 연주 뿐만 아니라 관악기와 대등한 위치에서 연주하는데도 능력을 발휘했음을 깨닫게 한다.
Time Waits: The Amazing Bud Powell 4 (Blue Note 1958)
1950년대 중반 이후 버드 파웰의 섬광같은 연주력은 조금씩 무뎌지기 시작했다. 병원 치료의 실패와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각종 진정제를 복용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래도 샘 존스(베이스), 필리 조 존스(드럼)와 함께 한 이 앨범에서는 아직 건재한 연주력을 보여주었다. 더구나‘Buster Rides Again’, ‘John’s Abbey’등을 비롯하여 앨범을 자작곡으로 채워 작곡가로서의 능력 또한 뛰어남을 입증했다.
Our Man In Paris – Dexter Gordon (Blue Note 1963)
버드 파웰은 1959년부터 1964년까지 파리에 머물렀다. 파리에 머무르면서 프란시스 포드라스의 보살핌을 받기는 했지만 그의 연주력은 눈에 띄게 약화되어 갔다. 그러나 당시 그처럼 유럽에 머무르고 있었던 색소폰 연주자 덱스터 고든과 함께 한 이 앨범에서는 달랐다. 다소 활력이 떨어졌다는 느낌은 있지만 특유의 화려한 솔로는 아직 그의 천재적인 능력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생각하게 했다. 그것이 그에게 남았던 거의 마지막 힘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