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일상을 정제한 재즈의 언어로 표현한 아름다운 음악
많은 사람들은 보통 예술은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속세를 벗어난 인간 정신의 지고함이 아름답게 표현될 때 미적,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더구나 여러 예술 가운데 음악은 추상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현실과의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예술은 현실적이다. 창작자가 아무리 자기만의 공간에서 창작활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작품은 을 창작자가 위치한 세계와 관련을 맺는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그 가운데 재즈는 늘 현실과의 관련성을 버리지 않았다. 사실 재즈는 탄생 자체가 역사, 사회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다양한 사조들의 흐름 또한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기에 이것이 아닌 바로 그 모습으로 발전하고 변화할 수 있었다. 물론 현실과의 관련성을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예술-음악-재즈가 있기는 하다. 현실과 상관 없이 복잡하고 정교한 미적, 음악적 사유 끝에 나온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재즈가 분명 있다. 하지만 작곡가 혹은 연주자와 음악을 떼어놓을 수 없듯이, 음악과 현실과의 관련성은 그 안에서도 늘 유지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의 주인공 정재열은 지금까지 재즈의 어법 안에 담긴 미적인 부분을 진지하게 탐구해 왔다. 그 결과 그의 음악은 코드의 조합과 진행이 정교하며 이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솔로 또한 기타가 지닌 표현력을 극대화된 모습으로 드러나곤 했다. 주지적(主知的)인 음악이랄까? 실제 그의 음악은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편하게 듣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갤러리에서 그림을 감상하듯 모든 것을 멈추고 음악에 집중하게 만든다. 지적인 감상을 통해 음악적 쾌감을 느끼게 하는 음악이 지금까지 정재열이 들려준 음악, 재즈였다.
이번 앨범도 첫 느낌은 이전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블루스 스케일, 대리 코드를 통한 긴장의 증가, 빠른 템포, 그리고 화려한 기교가 돋보이는 솔로, 긴박한 인터플레이 등으로 이루어진 앨범의 수록 곡들을 듣다 보면 정재열이 현실과 상관 없이 순수하게 음악의 새로운 어법을 만들어 내는데 매달렸구나 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앨범에서 정재열은 자신의 음악이 현실과 유리되기는커녕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밝힌다. 그것도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는 사회, 세계가 아니라 개인적이고 작은 일들이 있고 가족이 있는 그만의 소소한 일상과 관련이 있음을 드러낸다. 실제 앨범에 담긴 곡들은 정재열의 쌍둥이 아들 (Blues For Tim, Here You Go, John), 딸(Song For Anna)을 위하거나 새로운 학교 연구실로 옮긴 일(F228), 공연 준비 중 사운드 체크를 하다가 얻은 영감(Sound Check) 등을 재즈로 옮긴 것이다. 그러니까 음악적 실험 이전에 일상의 작은 일들이 우선적으로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음악만으로는 내 생각에 동의하는 감상자들이 많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소소한 일상을 반영한 음악이라 하면 편해서 아름다운 음악, 낭만적인 멜로디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감성적 음악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 삶을 위한 음악적 효용성은 높을 지라도 미적인 맛은 덜한 것이 일반적이다. 설탕이 과한 커피의 끈적한 뒷맛 같다고 할까? 그러나 이 앨범에 담긴 음악은 그렇지 않다. 첫 맛은 좀 쓰지만 그 쓴 맛이 뒤에는 그윽한 여운으로 남는 완벽한 커피 같다. 이것은 정재열이 자신의 일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면서 그 순간적인 느낌을 사유의 필터로 정제하여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일상에서 얻는 음악적 영감은 단순히 멜로디만은 아닌 것 같다. 블루스 스케일, 복잡한 리듬, 정교한 화성 등 보다 입체적인 형태로 떠오르는 것 같다. 그것을 공을 들여 다듬어 하나의 건축물처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그가 일상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을 당시 그를 둘러싼 순간의 세계를 음악 안에 넣었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그가 아들 티모시를 위해 만들었다는 ‘Blues For Tim’을 들어보면 그 서사적인 흐름이 단순히 아이의 웃는 표정을 그리는 것을 넘어 아이의 어제와 지금 그리고 아빠가 바라는 아이의 내일을 복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은‘Song For Anna’, ‘Here You Go, John’ 등 자녀를 위해 만든 다른 곡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예로 ‘Sand Play’를 들어보자. 지난 2007년도 앨범 <모래놀이>의 타이틀 곡을 새로 연주한 이 곡은 제목이 말하듯 모래 놀이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곡은 모래 놀이를 하는 아이의 동화 같은 풍경을 넘어 혼자 노는 아이의 슬픔, 외로움 등 그 뒤에 감추어진 정서를 드러낸다.
사실 정재열이 살면서 만난 소소한 일, 삶의 감정을 작곡에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7년도 앨범 <모래놀이>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래놀이>가 기존 정재열의 음악으로서는 드물게 피아노까지 편성에 포함시키며 정서적인 측면을 의도적으로 강하게 부각시키는 면이 있었다면 이번 앨범은 평소 정재열이 하던 편성과 연주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인간적 감성과 음악적 지성을 결합했다고나 할까? 실제 이 앨범은 일상을 예술적으로 정화한 작곡만큼이나 순간에 충실한 연주가 미덕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번 앨범에서 정재열은 그의 오랜 음악적 지우 벤 볼(드럼), 그리고 마틴 젠커(베이스)와 트리오를 이루어 연주했다. 이 트리오는 정재열이 작곡 단계에서 설정한 방향을 최대한 수용하면서 즉흥의 자유, 그 자유로운 조화의 아름다움을 가장 이상적으로 반영한 연주를 펼친다. 사운드의 중심을 지켜주는 마틴 젠커의 베이스, 복잡한 리듬과 함께 다양한 질감을 생산해 내는 벤 볼의 드럼, 사운드의 전면에서 냉정과 열정을 오가는 정재열의 기타, 그리고 이 세 연주자의 어우러짐과 펼쳐짐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상의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이것은 정재열의 기타가 중심이긴 하지만 드럼과 베이스 또한 자신의 공간을 차지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자연스럽게 다른 악기와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보장 받고 있는 앨범 타이틀 곡 ‘Song For Anna’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트리오의 호흡도 호흡이지만 벤 볼과 정재열의 호흡은 처남매부로 연결된 사이답게 서로가 서로에게 알터 에고(Alter Ego)라 할만한 호흡을 보여준다. 그 좋은 예가 ‘Sand Play’다. 정재열의 기타가 공간적인 여백을 활용하면서 차분한 연주를 이어가고 벤 볼의 드럼이 이에 반응하여 다양한 질감의 소리로 여백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인터플레이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해준다. 더구나 이처럼 절묘한 호흡은 모래 놀이를 하는 아이의 풍경을 확장하여, 만들면 이내 허물어지는 모래의 운명, 손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모래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는 정서적 효과로 이어진다. 이 외에 벤 볼이 평소 연습에서 즐기는 즉흥적인 리듬 패턴 연주에 대해 탄력적으로 반응하는‘Sound Check’, 변박 리듬이 발산하는 뒤뚱거리는 긴장을 즐기며 그것을 멈추었다 풀어나가는 ‘Joshua’같은 곡들도 두 연주자의 호흡이 단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해준다.
한편 순간적 감흥을 적극 따르는 연주들이긴 하지만 정재열을 포함한 트리오의 연주는 절대 감정이나 표현의 과잉에 빠지지 않는다. 빠른 속주에서도 음을 낭비하지 않고 흐름에 따라 필요한 음들만 경제적으로 사용할 정도로 이성적이다. 그렇기에 속도와 상관 없이 늘 여백이 감지되며 이 여백은 전체 연주의 흐름을 보다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다양한 가능성에 열린 형식과 긴장을 즐기는 연주로 이루어진 곡들이 잘 정돈된 형태로 어렵지 않게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F228’을 들어보기 바란다. 상당히 긴박하게 흐르는 포스트 밥 스타일의 곡이지만 하나의 정교한 건축물을 보는 듯한 입체감, 그 안의 공간적 여백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정재열은 이번 앨범을 통해 모든 것은 진심의 문제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모든 것을 자신의 삶에서 출발할 때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부단히 자신만의 음악적 표현 방식으로 그 삶을 표현할 때 그 음악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함을 공들인 작곡과 연주로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에게 음악은 일상의 언어를 갈고 닦아 빛을 내는 시인의 시(詩) 같은 셈이다. 우리는 지금 그의 마음이 담긴, 그러면서도 미적인 면을 놓치지 않은 작품을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