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 중에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는 속담이 있다. 너무 급히 서둘러 일을 하면 잘못하고 실패하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이 속담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하루는 늘 바쁘게 흘러간다. 해야 할 일은 많고 남아 있는 시간은 부족하다. 그래서 애일 정신 없이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보면 무슨 이유로 이리 쫓기듯 하루를 보내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때로는 나 자신을 잃은 것 같은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 이런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속도로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것이 쉬울까? 조금만 여유를 부려도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패배자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을.
여성 피아노 연주자 비기 어데어는 속도 중심의 가치관 하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그녀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연주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는 외적인 성공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연주하는 즐거움,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녀는 1937년 미국 켄터키주의 배런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올해 우리나이로 75세. 결코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녀는 더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것 같다.
그녀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후 곧바로 직업 연주자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녀는 재즈와는 거리가 있는 컨트리의 본고장 내쉬빌을 활동 무대로 삼았다. 하필 왜 내쉬빌을 선택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냥 삶의 파도가 이끄는 대로 내쉬빌에 가게 되지 않았나 생각될 뿐이다. 왜냐하면 내쉬빌에서 그녀의 활동은 재즈에 국한되지 않았고 또한 화려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쉬빌에서 펼친 활동은 음악적인 이유 이전에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었다. 텔레비전, 라디오, 광고, 영화 등의 상업적인 측면이 강하게 요구되는 분야에서 활동했고 따라서 연주 스타일 또한 팝 적인 면이 많았다. 재즈 연주는 그 활동의 일부분을 차지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활동에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활동을 즐기고 만족했던 것 같다. 삶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조급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첫 앨범 <Escape To New York>은 1991년, 그러니까 그녀가 55세가 되던 해에 발매되었다. 남들 같았으면 서서히 은퇴를 준비해야 할 나이에 첫 앨범을 녹음했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첫 앨범을 녹음하고 대단한 삶의 반전이 있으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첫 앨범 발표로부터 6년이 흐른 뒤인 61세가 되어서야 두 번째 앨범 <Sinatra Collection>을 발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그녀의 운명은 바뀌었다. 이후부터 그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15년간 24장의 앨범을 녹음하는 재즈 연주자로서의 활발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나이 든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노장 특유의 여유를 담아낸 연주가 주는 편안함 때문이었다.
그녀는 앨범마다 이전 앨범을 뒤집는 파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며 연주한다는 마음으로 냇 킹 콜, 프랑크 시나트라, 프레디 아스테어, 자니 머서, 콜 포터, 페기 리 등을 주제로 한 송북 형식의 앨범 혹은 1950년대 영화 음악, 크리스마스 등의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한 스탠더드 연주곡집을 차근차근 녹음했을 뿐이다. 그녀가 스탠더드 중심의 연주를 즐긴 것은 이들 음악이 미국 음악의 근간을 이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곡들은 그녀의 유년기를 장식했던 곡들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스탠더드 곡들은 가장 편한 음악이자 가장 편하게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었다. 이것을 여러 장의 앨범에 담아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은 비기 어데어가 그동안 선보였던 연주 가운데 대표곡을 정리한 것이다. 큰 욕심을 내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열심히 하며 여유 있게 살아온 그녀의 음악을 단번에 정리하려 한다는 것은 어쩌면 모순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대 이상으로 그녀의 음악을 잘 정리하고 있다. 이 앨범에 선곡된 ‘L-O-V-E’, ‘Night and Day’, ‘I’ve Got A Crush On You’, ‘Take The A Train’같은 스탠더드 재즈곡(혹은 영화 주제곡)과 비틀즈(‘Yesterday’, ‘In My Life’), 엘비스 프레슬리(‘Love Me Tender’, ‘I Can’t Help Falling In Love’)등의 팝 곡을 아우른다. 이들 곡들을 그녀는 가볍게 흔들리는 리듬을 배경으로 장식을 배제한 채 멜로디를 또렷하게 부각시키며 연주한다. 여기에는 그녀가 경험한 다양한 대중적인 세션 활동이 음악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함을 추구하는 그녀의 삶이 투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실제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그래서 재즈 연주자들이 마치 대단한 자아를 지닌 양 복잡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내쉬빌의 포크 컨트리 음악처럼 가벼이 이야기를 하듯 편하게 연주하기를 즐긴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연주는 긴장이 거의 없다. 이미 속을 다 터놓은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연주를 펼친다.
멜로디 중심의 연주와 함께 느린 연주 또한 비기 어데어의 음악적 매력을 구성한다. 실제 앨범의 거의 모든 곡들은 미디엄 템포 이하의 빠르기를 보인다. 그나마 속도감 있게 연주된 곡이 ‘I’ve Got You Under My Skin’이나 ‘Take The A Train’같은 곡인데 이 곡들 또한 다른 연주자들과 비교하면 느린 연주에 속한다. 이처럼 느린 연주는 바쁜 삶 속에서 그녀가 지켜온 여유의 세계를 표현한다. 그렇다고 그녀의 연주가 힘 없이 늘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 연주하지만 그 느낌은 언제나 산뜻하고 정겹다. 리그 최고의 강타자를 대담하게 슬로우 커브로 스트라이크 삼진 아웃을 잡아내는 노련한 투수와도 같은 연주다.
한편 이러한 그녀의 연주에 담긴 느긋함과 편안함은 삶에 대한 긍정적이고 낭만적인 시선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무조건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식의 현실도피적인 연주와는 좀 다르다. 노년의 깨달음 같은 연주라고 할까? 실제로 삶이 낭만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과 상관 없이 스스로 삶을 낭만적으로 바라보아야 가능한 연주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연주는 감상자를 편하게 어루만지는 힘이 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그럴수록 삶의 문제는 어려워진다고 그녀의 연주는 말한다. 대신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듯 편하게 생각하라고 위로한다. 그것이 노장 피아노 연주자가 음악으로 우리에게 말하는 삶의 교훈, 삶의 낭만이다.
비기 어데어의 연주를 들으며 나는 어느덧 세상을 떠나고 없는 에디 히긴즈를 떠올렸다. 물론 연주 스타일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은 닮은 구석이 있다. 일단 젊은 날을 보내고 뒤늦게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는 점이 두 연주자를 비교하게 한다. 그러나 그 전에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여유롭게 바라보고 이것을 음악으로 표현했다는 점이야 말로 가장 유사한 부분이 아닐까? 그러므로 에디 히긴즈의 연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비기 어데어의 연주 또한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휴식 음악의 역할을 하리라 예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