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를 이야기할 때 배놓을 수 없는 것이 재즈는 순간의 음악이라는 것이다. 연주자들이 연주(녹음) 당시의 자기 느낌과 상대와의 교감에 충실해 연주하기에 순간성을 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즈사를 살펴보면 연주자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참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순간성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많은 연주자들이 필요에 의해 만나서 한차례 즐기듯 연주하고 각자의 길을 가곤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한 연주자가 한 해에 여러 장의 앨범을 녹음할 수 있었다.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가‘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던가? 나 또한 재즈의 매력 가운데 순간성을 자주 언급하곤 한다. 나아가 그렇기에 재즈는 늘 신선하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하지만 연주자들이 그 때 그 때 만나서 음악적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싱싱한 순간의 진실을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그만큼 잘 조직되고 구성된, 완성도 높은 재즈를 만들어 내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특히 재즈를 앞으로 전진시킬 추진력을 발산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연주자들은 오랜 시간 자신과 함께 할 연주자들을 모아 그룹을 결성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의지의 실현을 도모하는 것이다. 실제 많은 재즈 명반들은 안정적인 그룹을 통해서 만들어졌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전설적인 두 퀸텟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재즈 환경에서는 하나의 그룹이 지속되기란 쉽지 않다. 음악적 견해 차이로 그룹이 와해되기 전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그룹의 지속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의 주인공 그룹 버드가 올 해로 결성 10주년이 되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더구나 이번 앨범이 두 번째 앨범이라는 것은 한국 재즈의 명암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버드는 2001년 베이스 연주자 김정렬을 중심으로 김상일(색소폰), 김준오(기타), 김태수(건반), 이덕산(드럼)이 모여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3년간 부단한 연습과 공연을 통 해 서로 호흡을 맞추면서 앨범을 준비하여 2004년 첫 앨범 <Petit à Petit>를 발표했다. 이 첫 앨범 타이틀이 ‘조금씩’ 혹은 ‘천천히’정도로 이해할 수 있으니 자기만의 시간, 속도로 연주를 하고 앨범을 만드는 버드만의 특성이 반영된 타이틀이라 할 수 있겠다. 실제 이후 버드의 활동은 화려함보다는 차분한 지속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각자 개인 연주 활동을 통해 경제적인 부분은 물론 음악적인 영역을 확장하면서 그룹 활동을 병행해왔다. 어쩌면 이러한 여유와 느림이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버드는 추억의 그룹이 되었을 것이다.
10년간 지속되면서 버드에도 변화가 생겼다. 바로 색소폰을 연주하던 김상일이 그룹을 나간 것. 그러나 그룹은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는 대신 쿼텟 편성으로 활동하는 것을 선택했다. 6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두 번째 앨범 <Art Theft>도 쿼텟으로 녹음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10년간 조금씩 쌓인 그룹의 여유가 앨범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앨범의 첫 번째 곡 ‘아프리카를 날다’에서부터 감지된다. 이 곡은 첫 번째 앨범 < Petit à Petit>에서도 앨범의 시작을 알렸던 곡이다. 그런데 첫 앨범에서 역동적인 퀸텟 사운드를 통해 아프리카의 넓은 대지에서 하늘로의 ‘비상(飛上)’의 느낌이 강했다면 이번 앨범에서는 보다 여유롭고 속도의 부담에서 자유로운 사운드를 통해 하늘에서 넓은 대지를 바라보는 관조적 유영의 느낌이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난다. 그룹의 느긋함은 이어지는 ‘그리움’에서도 장점으로 드러난다. 하림이 게스트로 참여해 멜로디를 허밍으로 노래한 이 곡에서 그룹은 폭 넓은 공간감과 그로 인한 여백을 강조함으로써 외로움, 쓸쓸함의 정서를 극대화하는데 성공했다. 앨범의 후반부에 배치된 ‘The Thief In JAVA’는 또 다른 차원의 여유를 느끼게 해준다. 이 곡은 몇 해전 버드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펼쳐진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했을 당시 이 곡을 작곡한 김태수가 지갑을 도둑 맞았던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좋지 않은 경험을 그룹은 넉넉한 호흡과 경쾌한 리듬을 통해 긴장이나 불쾌가 아닌 유쾌한 삶의 순간으로 표현했다.
한편 쿼텟 편성을 유지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게스트를 기용하여 보다 다채로운 사운드를 만들기도 했다. 이미 언급한 하림이 참여한 ‘그리움’ 외에 ‘Lat-In’에서는 김동하(트럼펫), 장효석(색소폰), 이한진(트롬본)으로 이루어진 브라스 트리오와 타악기 연주자 김현준이 라틴 재즈의 화려한 색채감을 멋지게 표현해주고 있으며 건반 연주자 김태수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만들었다는 ‘땡지’에서는 최근 색소폰 연주자 장효석이 도시적인 낭만을 느끼게 해주는 솔로를 펼친다. 또한 펑키한 분위기의 마지막 곡 ‘2BZ’에서는 김지석의 알토 색소폰이 그룹과 함께 탄탄하게 조여진 연주를 펼친다. 이처럼 쿼텟을 기본으로 곡마다 필요에 의해 유연하게 편성을 가져갔기에 앨범은 상당히 다채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다채로움은 그대로 재즈록, 라틴 재즈, 포스트 밥, 스무드 재즈 등을 아우르는 버드의 음악적 관심과 연결된다. 어쩌면 ‘예술 절도’라는 앨범 타이틀은 재즈의 다양한 스타일을 가로지르고픈 버드의 음악적 욕심을 의미하는 것인 지도 모르겠다.
버드의 음악은 스타일에 있어 퓨전 재즈에 속한다. 그런데 보통 퓨전 재즈 하면 많은 사람들은 연주의 즐거움 보다는 도시적인 정서를 우선적으로 표현하는 대중적인 연주 음악으로 생각하곤 한다. 이번 앨범의 경우‘땡지’, ‘그리움’ 등의 그 예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버드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연주의 즐거움을 기본으로 한 음악이다. 그 연주의 즐거움은 각 멤버들의 화려한 솔로와 합주 모두에서 느낄 수 있다. ‘The Cube’를 들어보자. 김정렬의 강박적이고 긴박한 베이스와 단속적인 이덕산의 드럼, 김준오의 직선적인 기타, 김태수의 신비로운 음색의 키보드가 록적인 질감의 사운드를 만들어 내는 이 곡은 김준오의 기타 솔로도 인상적이지만 네 연주자가 하나가 되어 질주하는 합주가 우선적으로 돋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번 앨범의 백미로 ‘Epilogue’를 꼽고 싶다. 다소 긴장 가득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이 곡은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그룹의 역동성을 맛보게 하는 동시에 멤버 각 개인의 연주자적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베이스와 드럼의 탄탄한 지원 위에서 기타와 키보드가 스스로는 다양한 음색으로 변화-무엇보다 직선적인 면과 공간적인 면을 아우르는 기타의 다양한 질감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를 거듭하고 또 서로의 위치를 바꾸어가며 펼치는 오밀조밀한 대화는 분명 편곡을 넘어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연주자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곡을 듣다 보면 버드의 뒤에 남겨진 10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멤버들 개개인이 이룩한 숙성된 연주 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0년 사이에 앨범을 두 장밖에 녹음하지 못했다는 것은 신중함을 고려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룹 외적인 요인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는 과작(寡作)에서 벗어나 조금은 더 자주 버드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