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ricas – Dominique Fillon (Cristal 2010)

재즈는 미국 뉴 올리언즈에서 태어났다. 즉, 재즈의 고향은 미국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실제 미국 재즈의 전통은 무시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으며 오늘까지도 재즈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 재즈의 이미지는 과거와 다르다. 재즈가 미국에서 시작된 음악이라는 사실은 잊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제 재즈는 미국이 아닌 세계의 음악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미국 재즈에 대한 반감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재즈가 음악적 공간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였다. 아방가르드, 프리재즈가 재즈의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찾아 아프리카 유럽 등지의 여러 음악 요소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 재즈가 보다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게 했던 것이다. 재즈를 미국 음악으로 받아들인 유럽 국가들 또한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재즈를 연주하기 시작해면서 재즈는 미국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이제 재즈는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고 북유럽 국가 등 유럽 여러 지역에서 연주되고 있다.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재즈가 연주된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연주되는 재즈는 각 지역, 혹은 국가의 음악적 개성을 내재하고 있다. 정말 재즈는 세계의 음악이 된 것이다.

프랑스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 도미니크 피용은 이번 두 번째 앨범을 통해 그 역시 재즈를 세계의 음악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것은 무엇보다 앨범에 참여한 멤버를 통해 드러난다. 앨범은 트리오를 기본으로 여러 게스트 연주자들이 필요에 따라 참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앨범의 기본을 이루는 트리오는 프랑스의 도미니크 피용(피아노)을 중심으로 미국인 스티브 로드비(베이스), 이탈리아계 호주인 닉 세시레(드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여기에 스웨덴의 울프 와케니어스(기타), 한국의 나윤선(보컬), 또 다른 프랑스인 올리비에 로망 가르시아(기타)가 게스트로 참여했다. 물론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교차하는 것이 유럽, 그리고 프랑스이기에 이러한 인적 구성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사운드의 기본이 되는 트리오의 녹음을 미국 시카고에서 하고 올리비에 로망 가르시아의 녹음은 프랑스 세브레에서, 울프 와케니어스의 녹음은 스웨덴의 고텐부르그에서 나윤선의 녹음은 한국의 서울에서 녹음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니까 도미니크 피용은 유럽-미국-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인적 구성과 녹음을 통해서 범세계적인 재즈를 만들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그의 다양한 음악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이번 앨범은 그의 두 번째 앨범이다. 첫 앨범 <Détours>는 2007년에 발매되었다. 하지만 그의 경력은 그보다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1968년생인 그는 클래식, 록, 라틴 음악, 재즈를 들으며 성장했으며 17세부터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주로 활동했던 음악은 록이 주를 이루었다. 이후에도 재즈 록, 펑크 쪽 연주를 주로 했다. 그러나 연주자로 주목 받기 전에 작, 편곡자 그리고 제작자로 역량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미셀 퓌갱, 베르나르 라비에르 같은 프랑스 대중 음악의 주요 인물의 앨범도 있었지만 주로 월드뮤직 성향의 앨범들을 제작했다. 그리고 2006년에는 프랑스어권의 재능 있는 신예 음악인을 발굴하는 콘테스트 프로그램‘Domtomfolies’의 음악 감독을 밭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그가 재즈 이전에 다양한 음악의 영향을 받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왔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에게 음악적 경계, 지역적 경계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들려주는 범 세계적인 음악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일체의 소요(騷擾)가 정돈된 음악이다. 화사하게 움직이는 리듬을 배경으로 투명한 피아노가 산뜻한 멜로디를 이어가는 음악. 여기에 속삭이는 듯 부드러운 노래와 목가적인 기타가 어우러진 음악. 그래서 프랑스인도, 스웨덴인도, 미국인도, 한국인도 공감하고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이다. 각기 처한 상황은 다르더라도 분주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에게 전원 속 풍경을 여행하는 듯한 기분 좋은 상상을 하게 하는 음악 말이다. 사각거리는 청량한 리듬과 흥얼거리는 듯한 기타와 피아노의 멜로디가 적당한 흥을 돋구는 ‘Live It Up’같은 곡이 좋은 예이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삶, 미디엄 템포로 여유롭게 흘러가는 삶을 생각하게 한다. 이 밖에 ‘Lucky’, ‘Sur La Terre Etrangère 이국의 땅에서’같은 곡들도 목가적인 삶을 그리게 만든다.

이렇게 세계 각지의 연주자들이 가상으로 모여-게스트 연주자들은 그들의 땅을 벗어나지 않았음을 상기하자-그들의 합집합으로서 범세계적인 음악을 만들어 냈다면 도미니크 피용은 여기서 다시 미국을 교집합의 중심에 놓는다. 파리가 아니라 시카고에서 트리오 녹음을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는 미국 밖에 위치한 이방인의 관점, 여행자의 시선을 유지하려는 듯하다. 그래서 이 앨범이 말하는 미국은 재즈의 정통성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물론 도미니크 피용의 연주에서 키스 자렛, 오스카 피터슨 등 미국 재즈 피아노의 거장들의 영향이 은연 중에 드러나고 ‘Diabolo 66’ 같은 곡을 통해서는 블루스에 대한 그의 애정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의 범세계적인 재즈에 이런 부분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대신 팻 메시니적인 감성이 강하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실제 ‘Sur La Terre Etrangère’,‘Didier Road’ 같은 곡을 들어보면 어쿠스틱 사운드이기는 하지만 그 목가적 정서가 팻 메시니를 많이 연상시킨다. 여기엔 스티브 로드비가 팻 메시니 그룹의 베이스 연주자란 사실, 울프 와케니어스가 팻 메시니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외에 팻 메시니가 재즈만큼이나 컨트리와 포크 음악에 영향을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아르헨티나, 멕시코, 카메룬, 브라질 등 여러 나라의 연주자들과 호흡하면서 월드 뮤직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보다 세계적인 여행자적 음악을 만들어 냈음을 생각하면 도미니크 피용의 음악이 이와 유사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그리 낯설어할 일은 아니다.

게다가 앨범을 무조건 팻 메시니의 아류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도미니크 피용을 중심으로 연주자들의 개성 또한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내가 보기에 앨범의 주인을 제외하고 나윤선이 가장 인상적이다. 그녀는 어떠한 상황에서건 자신만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번 앨범에서도 그녀는 참여한 두 곡‘Life After You’와 ‘Where I Come From’에서 특유의 부드럽고 신비로운 목소리로 사운드의 깊이를 주며 두 곡만큼은 그녀가 주인공임을 밝힌다.

이번 앨범의 타이틀은 ‘Americas’다. 하나의 미국이 아닌 복수(複數)의 미국이다. 나는 복수의 미국이 앨범에 참여한 여러 연주자들이 바라본 미국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각각의 연주자들이 자신만의 재즈를 들려주지만 그 아래에는 미국에 고향을 둔 재즈의 전통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앨범에 담긴 미국이라는 교집합은 각 연주자들의 시선의 합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수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당연하다.

어쩌면 이 앨범이 말하는 미국이란 것이 다소 피상적이지 않은가, 적어도 재즈와 미국 하면 블루노트, 블루스가 어우러진 흑인적인 무엇이 드러나야 하지 않은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각 연주자들의 미국, 재즈에 대한 관점이‘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식의 착각으로 비추어질 질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것이 각 연주자들이 코끼리의 다리만 보았건 코만 보았건, 아니면 귀만 보았건 그들이 본 것이 미국의 일부임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각 연주자들의 관점이 하나로 모이면 온전한 코끼리가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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