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EBS 한국 영화 시간을 통해 정창화 감독의 <위험한 청춘>을 보았다. 영화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60년대 서울 풍경이 흥미로워서였다.
영화 내용은 단순하다. 누나 옥주(문정숙)를 버린 남자 민전무 (허장강)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동생 영아(문희)에게 접근해 같은 방식으로 버리는 주인공 덕태(신성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그 사이 화해도 담고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지금의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만큼 현대적이기도 하다는 뜻. 실제 서사의 전개는 불편한 부분이 적다. 비약이 조금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제작 자체의 문제 이전에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한 불친절한 도약 정도로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민전무가 덕태와 싸운 뒤에 그를 이해하고 동생을 부탁하는 장면, 금방 그에게 형님이라 부르는 덕태, 분명 강간-이것을 감독은 흑탕에 빠져 비를 맞는 인형으로 상징했다-이었는데 이내 덕태를 사랑하고 언제나 사랑할 것이라 말하는 순애보적 영아, 그리고 여기저기 드러나는 문어적인 대사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을 60년대의 풍경으로 바라보면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몇 가지 시대적인 특징을 발견했다.
- 그 당시에도 Esquire 구두가 이미 있었다는 것, 간판이 특유의 영어 필기체로 다른 간판들-예를 들면 지금의 호프집을 대신해 전, 막걸리를 파는 가게의 간판-과 확연히 두드러지게 보였다. 근처에 La Seine라는 프랑스적인 카페 간판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모던하게 보였다.
- 한편 당시 음악 감상실은 극장 같은 곳 텅 빈 무대를 앞에 두고 흐르는 음악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는 구조를 띄고 있었다. 입장료를 받고 들어가 그리 음악을 들었던 모양이다.
- 주인공 덕태는 누나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주거 형태가 특이하다. 원룸 형 아파트인데 누나와 동생이 각기 다른 구석에 침대를 두고 생활한다. 그리고 실내에서 신을 신고 다닌다. 실제 당시의 아파트-지금과는 달리 돈 없는 사람들이 주거하는 곳의 이미지가 강했던-주거 형태가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외국 영화 흉내를 내려고 그랬던 것인지 궁금하다. 아울러 실내 장식으로 한동안 유행했던 기타 장식 외에 모던한 그림들을 벽에 걸어 놓은 것도 인상적이다. 누나가 양장점에서 일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마네킹을 집안에 둔 것은 나름 감독의 디테일로 보인다. 그런데 영화 소개를 보니 이 영화를 당시 유행했다는 가난한 청춘의 신분 상승 영화로 보고 덕태 남매를 가난한 집안으로 설정했는데 내가 보기엔 전혀 그리 보이지 않았다. 하긴 지금 드라마도 가난하다면서 부자적 소품을 사용하긴 하지만.
- 덕태가 일하는 카바레 풍경 외에 지금의 록 카페 같은 분위기의 클럽 장면이 나온다. 의자에 앉아서건 일어나서건 막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재미있다. 정말 막춤이었다! 팔만 미친 듯이 흔드는. 그것으로 당시의 청춘은 자유를 느꼈겠지?
- 영화의 전반적인 배경 음악은 한국 영화 음악 특유의 스트링 섹션이 강조된 연주 음악, 왠지 계몽적인 느낌이 나는 음악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내용상 카바레나 다방을 무대로 할 때 등장하는 음악은 기타가 강조된 고고 음악이 주를 이룬다. 특히 위에 언급한 클럽 장면에서 상당히 빈약한 고고 사운드인데도 사람들이 미친 듯 춤을 춰서 놀랐다. 또한 덕태가 영아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섹스텟 편성의 부드러운 하드 밥 재즈-‘Topsy’인데 누구의 버전인지 모르겠다-가 들려서 놀라웠다. 당시 카페에서는 저런 음악을 배경으로 틀기도 했구나 생각하면 60년대가 오히려 지금보다 더 재즈적이었구나 생각하게 된다. 지금 하드 밥을 들을 수 있는 카페는 많지 않다.
- 그 외에 포장되지 않은 골목 풍경, 트럭 대신 리어카에 물건을 싣고 다니는 상인, 집 앞에 놓인 네모난 쓰레기 통도 그 시대를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