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늦게 일어나서 방치된 DVD 더미에서 이 영화를 골라 보았다. 한때 그로테스크한 예술을 좋아했던 적이 있다. 그때 데이빗 린치의 영화도 나름 좋아했다. 하지만 사실 그 때 내가 그의 영화를 다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환상적 상상력에 놀라고 자극 받았을 뿐이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 의외로 추리형식으로 잘 진행된다 싶더니 그동안 벌여놓은 사건들을 모두 하나로 뭉쳐 환상적인 진행으로 어리둥절하게 해결해 버린다. 그 환상은 베티(나오미 와츠)와 리타(로나 엘레나 헤링)사이에 벌어진 일은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결해 주지만 그 사이에 일어났던 영화 감독, 살인 청부업자 등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갑자기 의미를 잃고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인터넷을 찾아보니 원래는 TV 시리즈를 위해 파일럿으로 제작했던 것이 무산되자 결말부분을 찍어서 두 시간 반의 영화로 만든 것이라 한다. 그렇기에 중간에 삽입된 캐스팅 압박을 받는 영화 감독,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살인 청부업자 등에 관한 이야기가 분위기만 잡고 겉돌았던 것이다. 즉, TV 시리즈로 만들었다면 다른 인물들도 각자의 생명력을 보였을 거란 이야기. 그렇기에 원래 환상적인 요소를 자주 자용하는 데이빗 린치지만 이 영화의 결말은 모든 각각의 에피소드를 하나로 모이게 만들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왜냐하면 각 인물들의 개별 이야기들이 다 제시되지 않은 채 모든 인물들이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베티와 리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낸다. 그것은 그간의 모든 것이 베티의 욕망이 반영된 꿈이었다는 것. 이런 영화는 한번 보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다시 보기를 여러 번 해야 나름의 의미를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영화를 다시 보며 이야기를 재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보고 나서 오랜 시간 생각하는 것 까지는 가능해도 말이다. 그러므로 사실 이 영화는 참 불친절한 영화다. 그럼에도 재미있다. 괜찮다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100% 이해되지 못해도 그 순간순간의 환상적인 흐름, 그리고 감상자를 영화 안에 위치시키고 동화되게 하는 것에 있지 않나 싶다. 하지만 나의 현실로 돌아온 지금 영화를 다시 보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