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gs From Movies And Musicals – Laura Fygi (Universal 2009)

뮤지컬과 영화를 주제로 정리한 로라 피지의 노래

1990년대 중반 로라 피지가 국내에 소개되었을 때 그 반응은 대단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즈가 국내에서 큰 관심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사람들의 관심은 엘라 핏제랄드, 빌리 할리데이, 사라 본 등 유명 디바의 오래된 노래들에 쏠려 있었다. 그러던 차에 로라 피지의 등장은 동시대의 재즈 보컬에 관심을 갖게 했으며 그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의 삶에 어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실제 그녀의 벨벳처럼 부드러우며 안개처럼 포근하게 감아드는 그녀의 노래들은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 안에 낭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국내에 알려졌을 때 다이아나 크롤 또한 국내에 소개되었는데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른 듯하지만 그 때만 해도 로라 피지가 더 인기가 있었다. 각종 광고나 <미술관 옆 동물원>같은 국내 영화의 OST로도 사용될 정도였다. 지금도 그녀가 노래한 ‘I Love You For A Sentimental Reason’, ‘Let There Be Love’같은 곡은 달콤한 재즈 곡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현재는 로라 피지의 인기가 예전만큼 못한 것 같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국내에서 다소 시들해진 재즈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90년대 중반만 해도 재즈는 한국에서 하나의 음악이 아니라 고급 문화의 상징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재즈는 몰라도 그냥 그 분위기에 취해 재즈를 듣는 일반 감상자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전통적인 스윙부터 도시적인 퓨전 재즈, 라틴 재즈 등 다양한 스타일을 넘나드는 로라 피지의 노래들은 편안하고 쉽게 재즈를 접하는데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재즈에 대한 일반 감상자들의 관심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기에 일반 대중을 중심으로 사랑 받았던 로라 피지의 인기가 더 떨어지게 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것은 국내에서의 사정일 뿐이다. 여전히 그녀는 모국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그녀의 인기는 지난 2009년 싱가포르에서 <Victor/Victoria>라는 뮤지컬의 주연을 담당할 정도 상당한 모양이다.

이 앨범은 바로 그녀가 처음으로 뮤지컬에 출연, 그것도 주연으로 출연하게 된 것에 맞추어 기획된 베스트 앨범이다. 그러니까 앨범 타이틀이 의미하듯 18년간 그녀가 발표한 앨범 가운데 영화나 뮤지컬 주제 음악을 노래한 것만 두 장의 CD로 정리한 것이다. 그 가운데 콜 포터의 곡과 미셀 르그랑의 곡이 대거 눈에 뜬다. 먼저 콜 포터는 프레드 아스테어가 주연한 1932년도 뮤지컬 <The Gay Divorce>의 주제 음악 ‘Night & Day’를 비롯하여 1929년도 뮤지컬 <Fifty Million Frenchmen>의‘You Do Something To Me’그리고 1935년도 뮤지컬 ‘Jubilee’의 ‘just One Of Those Things’가 선택되었다. 그리고 미셀 르그랑의 경우 1964년도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주제곡 ‘I Will Wait For You’, ‘Where Is The Love’, ‘Watch What Happens’, 1968년도 영화 <The Thomas Crown Affair>의 주제 음악 ‘The Windmills Of Your Mind’, 1969년도 영화 <The Happy Ending>의 삽입곡 ‘What Are You Doing The Rest Of Your Life’, 1971년에 제작된 <Summer Of 42’>의 주제곡 ‘The Summer Knows’, 1983년도 영화 <Yentl>의 삽입곡 ‘The Way He Makes Me Feel’등이 수록되었다. 그 밖에 1934에 제작된 영화 <Dames>의 삽입곡 ‘I Only Have Eyes For You>, 험프리 보커트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1942년도 영화 <카사블랑카>의 삽입곡 ‘As Time Goes By’, 1956년 멕시코 영화 <Historia De Un Amor>의 동명 주제곡, 1949년도 뮤지컬 <미녀는 금발을 좋아해>의 삽입곡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 등이 수록되었다. 물론 1998년도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 삽입된‘Let There Be Love’도 들을 수 있다. 이 선곡 가운데 유난히 미셀 르그랑의 곡들이 대거 수록되었는데 이것은 그녀의 1997년도 앨범 <Watch What Happens>가 미셀 르그랑을 주제로 한 앨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라 피지가 노래한 영화와 뮤지컬 주제음악을 정리했다고 해서 이 앨범이 로라 피지의 특별한 면을 정리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굳이 앨범을 감상하면서 그 곡이 처음 등장한 영화나 뮤지컬과의 상관 관계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로라 피지 역시 이들 곡들을 영화나 뮤지컬의 차원에서 노래하지 않았다. 사실 연주하고 노래하는 사람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재즈가 아니던가? 그리고 따지고 보면 재즈 레퍼토리의 근간을 이루는 스탠더드 곡들의 상당수가 뮤지컬이나 영화 음악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로라 피지 또한 이들 곡들을 재즈의 스탠더드 곡들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노래했다. 게다가 몇몇 곡들은 원래의 영화나 뮤지컬보다 재즈로 들어와 연주되고 노래되면서 더욱 유명해진 것들이다. 예를 들어‘Night & Day’는 프레디 아스테어의 노래로도 유명하지만 냇 킹 콜의 노래가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You’ve Change’는 어떤가? 빌리 할리데이의 쓰디 쓴 버전이 먼저 떠 오르지 않던가? 그리고 ‘My Foolish Heart’같은 곡도 1949년의 동명 영화와 상관 없이 재즈의 명곡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 앨범은 뮤지컬과 영화 음악을 주제로 로라 피지를 바라보았다는 것이 진정한 주제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앨범이 로라 피지가 그동안 걸어온 길을 충실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녀는 1991년도 앨범 <Introducing>을 시작으로 라이브 앨범 포함 총 11장의 앨범을 선보였다. 그 가운데 8장의 앨범 수록 곡이 이번 베스트 앨범에 선곡되었다. 영화나 뮤지컬 관련 곡을 담지 않아 선택되지 못한 3장의 앨범이 제외되었다는 것이 아쉬울 수도 있지만 8장의 앨범만으로도 충분히 로라 피지의 음악적 매력을 잘 정리했다고 본다. 이 앨범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소편성부터 대형 오케스트라까지 다양한 편성을 소화하고 전통적인 보컬 재즈 스타일부터 라틴 스타일을 가로지르고 미국, 스페인, 프랑스를 아우르면서도 변하지 않는 로라 피지 특유의 부드럽고 낭만적인 노래다. 그리고 어떠한 곡이라도 재즈의 전통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편하게 노래하는 그녀의 대중적 매력 또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음악적으로 다양한 스타일을 가로지르고 대중적인 면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녀의 음악이 쉽게 만들어졌다거나 가볍다는 식의 비평이 있어왔다. 이에 대해 이 베스트 앨범은 그런 비평이 어느 정도 이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갈수록 대중적 측면과 음악적 깊이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물론 그동안 로라 피지의 음악을 정리한 베스트 앨범이 몇 장 발매되긴 했었다. 그 앨범을 소장한 사람이라면 이번 앨범이 다소 사족으로 다가올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앨범이 가장 최신 판인 만큼 뒤늦게 로라 피지를 알게 된 감상자라면 이 앨범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 되리라 생각한다. 또 그럴 경우 로라 피지를 통해 쉽게 재즈 속으로 더 깊이 빠질 수 있을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