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시간에 쫓기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토록 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에게 물질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여유롭고 풍요로운 미래를 약속하곤 했지만 어째 갈수록 우리네 삶은 빡빡하고 건조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특히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늘 부족한 갈증과도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를 잊고, 나의 현재를 잊고 우왕좌왕 헤매다 하루를 마치곤 합니다. 이렇게 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삶이 바쁘게 흘러간다고 느낄 때 우리는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게 됩니다. 조금은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곳. 사실 이것은 도시를 떠나 잠시 산이나 바다, 아니면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가면 단번에 해결 가능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일상이 그럴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럴 때 우리는 음악을 찾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그 음악이 이끄는 시공간 속으로의 여행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러한 상상을 하고 나면 제법 현실이 견딜만한 것으로 느껴지곤 합니다. 음악을 통해서 결국 바쁜 일상이 주는 마음의 피로를 치유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은 어떤 것일까요?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스타일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R&B, 소울, 스무드 재즈처럼 첨단의 전자적 사운드로 도시적 낭만을 표현하는 음악이고 다른 하나는 포크, 뉴 에이지, 어쿠스틱 재즈처럼 평범한 악기로 자연적인 여유, 휴식의 측면을 강조하는 음악이죠. 그런데 전자적 사운드의 음악은 도시적인 맛을 살리면서 너무 감각적인 측면으로 흐른다는 아쉬움이 있고 어쿠스틱 성향의 음악은 자연미가 돋보이지만 공감하기 어려운 너무 먼 곳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이 두 가지 성향을 종합한 음악들이 종종 등장하고 있습니다. 도시적이면서도 자연적인 느낌의 음악이랄까요?
이러한 새로운 흐름 가운데 일본 출신의 여가수 에이슈의 음악도 포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만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를 둔 도쿄 출신의 여가수가 들려주는 음악은 외관상 어쿠스틱 악기가 중심이 되어 자연미를 살린 단아하고 정갈한 음악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음악은 자연적이면서도 도시적인 정서를 느끼게 해줍니다. 다른 곳이 아닌 도시를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고독과 즐거움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아무래도 에이슈가 주로 기존 팝 히트 곡들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그녀가 석 장의 앨범을 통하여 노래한 곡들을 살펴보면 60년대부터 지금까지 많은 대중적 사랑을 받은 포크, 록, R&B 등 영미 팝음악의 대표 곡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앨범 <Songs>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번 앨범은 국내에는 순서상 세 번째로 소개되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녀의 첫 번째 앨범입니다. 이 첫 앨범부터 그녀는 영미 팝의 히트 곡들을 노래하며 이후 <Colors>나 <Cinema> 등의 앨범에서 전개될 자신의 음악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에이슈 음악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번 앨범에서 그녀는 폴리스의 ‘Every Breath You Take’, 홀 앤 오츠의 ‘Private Eyes’, 탐슨 트윈즈의 ‘Hold Me Now’같은 80년대 팝부터 영 래스컬스 이후 고전이 되어버린 ‘Groovin’’, 알 그린의 ‘Take Me To The River’, 스티비 원더의 ‘Lately’같은 R&B 소울 음악, 조니 미첼의 ‘The Circle Game’ CCR의 ‘Have You Ever Seen The Rain’같은 포크, 록 음악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히트 곡들을 노래합니다. 그녀가 이처럼 다양한 곡들을 선택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 곡들을 어릴 적부터 즐겨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무튼 이번 앨범에서 그녀가 노래한 곡들은 대부분 독특한 개성으로 도시적인 느낌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나 80년대의 신스 팝, 뉴 웨이브 곡들이나 R&B 곡들은 도시적인 정서가 상당히 강합니다. 그런데 에이슈는 이들 곡들을 보다 소박하고 정갈한 공간에 위치시킵니다. 마치‘단순한 것이 아름다운 것’임을 입증하려는 듯 모든 것을 풀어 해쳐 가장 기본적인 멜로디를 팝과 재즈를 오가는 피아노(혹은 키보드) 트리오를 배경으로 드러냄으로써 자연미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첨단이었던 80년대 전자적인 신스 팝들은 소박하고 차분하게 정화되었으며 R&B 소울 곡들은 특유의 육감적인 부분이 제거되어 담백한 맛으로 다가옵니다. 또한 거친 질감의 록 성향의 곡은 부드러운 질감으로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한편 비브라토(떨림)없이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노래하는 에이슈의 창법 또한 ‘단순함’의 매력을 유감 없이 보여줍니다.
이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질감의 곡들을 단순화시키고 여백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기에 에이슈의 노래는 도시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느낌을 줍니다. 특히 조급함 없이, 특별한 과장 없이 멜로디를 담담하게 이어가는 그녀의 노래는 시간의 흐름을 잠시 늦추는 듯한 느낌마저 갖게 합니다. 그렇다고 느림이 돋보이는 그녀의 노래가 포크나 유에이지 음악처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산, 바다 같은 공간을 상상하게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많지는 않지만 도시 속에 위치한 작은 공원, 벤치에 더 가깝습니다. 도시적인 삶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여유를 찾는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공간 말이죠. 사실 도시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원했던 여유는 바로 이 정도가 아니었던가요? 아무튼 우리의 일상을 떠나지 않는 음악이기에 그녀의 노래는 무척이나 친근감 있게 다가옵니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심심하다. 색이 없다라는 부정적인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진지한 음악 감상을 원하는 분들에게 이 앨범은 강렬한 무엇이 부족한 것으로 비추어질 것입니다. 사실 음악적인 측면으로만 본다면 에이슈의 음악은 자신의 개성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은 평범한 팝 재즈 혹은 재지 팝(Jazzy Pop) 정도로 가벼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상자를 자신의 세계로 이끌어 자신만을 보게 만드는, 진지한 음악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를 뒤로 감추고 배경이 되기를 기꺼이 즐기는 음악도 있습니다. 이런 음악은 감상자가 이정적인 잣대로 평가를 내리기 전에 감상자의 정서를 먼저 자극합니다. 에이슈의 음악도 그런 차원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일체의 심각함 진지함을 잠시 옆으로 밀어두는 잠깐의 쉼 같은 음악.
그러므로 저는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에이슈의 음악을 귀 기울여 듣지 않기를 부탁 드립니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배경으로 두기를 바랍니다. 다른 일에 빠져 음악이 잘 들리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그냥 바쁜 하루 가운데 잠깐 멈춤이 필요한 시간, 침묵이 주는 어색함을 피하고 싶을 때 침묵을 메우기 위해 앨범을 플레이어에 건다면 그것이야 말로 에이슈의 음악의 가장 적합한 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